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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8월 31일] 1914년, 폰 클룩, 제1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을 내리다.


오늘의 역사/8월 2010.08.31 00:00

1914년 8월 31일,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군 중 최우익으로 파리 북쪽에서 진격하고 있던 폰 클룩의 독일 1군이 진격 방향을 파리가 아닌 남동쪽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폰 클룩은 후퇴하고 있던 프랑스군과 파리 사이로 파고 들어가 2군, 3군과 협력하여 프랑스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했던 것이다. 파리 입장에서 보면 파리 북동쪽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상황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기준으로 내린 결정이었으며,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폰 클룩의 선회 결정 후 독일 1군의 기동은 마른 전투로 이어졌으며 독일군은 조기에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이후 4년 간 길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1914년 8월 1일 저녁 7시, 독일군 16사단이 룩셈부르크-독일 국경을 처음으로 월경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1906년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관통하여 "최우익의 병사 소매에 도버해협이 스치도록" 북프랑스를 가로질러 파리와 프랑스군을 포위 섬멸하여 전쟁을 조기 종결하려 했다. 독일군의 최우익은 알렉산더 폰 클룩(Alexander von Kluck)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1군이었다. 1군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 독일 야전군급 부대 중 가장 행군거리가 길었다. 폰 클룩의 1군이 담당한 목표지는 파리의 서쪽을 우회하여 파리 남쪽으로 도는 것이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의 기동 계획은 다음 지도와 같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21세기의 논쟁 보기


벨기에 리에쥬 요새에서 시간을 다소 끌긴 했으나 독일군은 우익에 병력을 집중한 덕분에 북프랑스로 침입했다.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독일군의 작전 계획을 전혀 몰랐으며 독일군 우익, 프랑스 입장에서는 좌익에 그렇게 많은 병력이 배치했을 것이라고 예측하지도 못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의 관심은 1870년 전쟁에서 잃은 알자스와 로렌의 회복이었다. 벨기에 국경 지대[각주:1]를 통과한 후 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셉 조프르(Joseph Joffre)는 뮤즈 강 북쪽 독일군이 주력이라는 사실을 8월 14일까지 믿지 않았다.[각주:2] 그러나 조프르도 조금씩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늦어 8월 24일, 독일군은 국경지대 전투를 승리로 마감했고, 5개 군 100만명을 낫 모양으로 슐리펜 계획에 따라 파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은 정신없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8월 30일, 파리 북쪽 꽁피에뉴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 20km (12마일) 떨어진 라씬니이(Lassigny)의 한 별장에 독일 1군 사령관 폰 클룩이 나타났다. [각주:3] 슐리펜 계획에서 폰 클룩은 극우익이다. "도버 해협에 병사의 소매가 스치게" 진격하여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며, 그와 그의 1군은 가장 먼 거리를 기동해야 했다. 폰 클룩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알렉산드르 폰 클룩(Alexander von Kluck)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은 병력 부족 문제였다. 슐리펜 계획 원안과 달리 참모총장 소(小) 몰트케는 병력을 독일군 좌익에 상당한 비중으로 재배치했다. 슐리펜 계획 원안에서는 우익이 9, 좌익이 1의 비율이었지만, 몰트케가 수정한 계획에는 우익이 7, 좌익이 3의 비율이었다. 여기에 전투 손실, 안트베르펀에서 버티는 벨기에군 견제를 위해 남겨둔 병력으로 처음 출발할때보다 병력이 줄어 있었다. 하지만 병력 충원은 없었다. 이 병력으로 원래 계획된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여 파리 남쪽을 돌아 파리와 프랑스군을 포위하기는 무리라 여겨졌다. 폰 클룩은 모누리(Michel-Joseph Maunoury) 장군의 프랑스 6군과 존 프렌치(John French, 1st Earl of Ypres)[각주:4]가 지휘하는 영국 원정군의 위협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 부대 상태와 달리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각주:5]은 길가에 탄약과 짐을 마구잡이로 버리고 후퇴하곤 했다. 영국 원정군을 추격해온 폰 클룩은 그 모습을 보고 영국 원정군을 과소 평가했다.

하지만 병력 부족 문제보다 폰 클룩이 진격로 변경을 결심한 것은 프랑스군은 이미 궤멸했으니 굳이 파리 서쪽과 남쪽으로 크게 우회할 필요없이 에워싸면 되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각주:6]. 폰 클룩이 보기에 프랑스군은 이미 지리멸렬했으며 영국 원정군도 별 것 아니었다. 여기에 8월 30일 오후 6시 30분, 독일 2군 사령관 뷜로브(Karl von Bulow)가 한 통의 전문을 보내왔다. .샤를 랑르작(Charles Lanrezac) 장군[각주:7]이 지휘하는 프랑스 5군을 격멸하기 위해 "안쪽" 즉, 파리 북동쪽이며 1군 입장에서는 현 위치에서 남동방향이다. 독일군 체제에서 폰 클룩은 야전 지휘관으로 참모본부의 명령없이도 독자로 상황을 판단하여 의사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9월 2일에 몰트케가 전선 사령관들에 내린 명령은 폰 클룩의 선회를 사후 승인한 것에 불과하다. 폰 클룩은 자신이 알고, 보고 있던 상황과 뷜로브의 전보를 바탕으로 8월 31일, 폰 클룩은 휘하 군단에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파리를 오른쪽에 끼고 진격한다는 명령이었다. 프랑스 5군을 격멸하고 2군과 벌어진 간격을 좁힐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내린 명령이었다. 다음은 폰 클룩의 기존 진격 계획과 새로운 진격 명령이다.

독일 1군의 새로운 진격로는 프랑스 6군과 영국 원정군, 그리고 파리를 오른쪽에 두고 마른 강 방면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폰 클룩은 프랑스 6군과 영국 원정군을 무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바보는 아니었다. 조프르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 6군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급히 차출하여 구성한 파리 수비대는 폰 클룩이 무시해도 될 수준이 아니었다. 조프르는 반격을 위해 파리에 병력을 계속 집결시키고 있었다. 영국 원정군도 독일군과 심각한 교전을 가능한 한 회피하며 파리 남동부로 후퇴한 후[각주:8], 반격에 가담할 준비를 했다. 조프르와 프랑스군이 폰 클룩의 선회를 알게 된 것은 9월 2일이었는데, 폰 클룩의 선회를 알게 된 조프르는 매우 기뻐했다. 그들이 측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독일군을 몰아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9월 2일, 프랑스 5군과 영국 원정군은 마른 강을 건넜다. 9월 3일, 폰 클룩의 1군도 마른 강에 도착했다. 2군과 진격 속도를 맞추기 위해 정지하라는 명령을 무시한 클룩은 다음 날 마른 강을 건너 선회를 계속했다. 여전히 그는 프랑스군이 지리 멸렬 상태라고 믿고 있었고, 지금 계속 기동해야 프랑스군을 궤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부하들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1군의 한 장교는 파리 측면을 걱정하지 않으며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잔당"을 전멸시킨 후 파리에 입성할 것이라고 상황을 낙관하는 기록을 남겼다. [각주:9]. 하지만 프랑스 5군이나 영국원정군이나 장거리 행군으로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폰 클룩과 독일군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수준은 아니었다. 9월 5일, 조프르는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2군을 앞질러 진격하고 있던 1군은 2군과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그 틈새를 갈랐다.

결국 폰 클룩의 8월 31일 결정은 프랑스군에 측방과 후방을 노출하여 프랑스군에 반격할 기회를 주었다. 이제 전쟁을 단기전으로 조기 종결한다는 독일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반격에 밀려 후퇴하던 독일군은 참호를 깊게 파고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참혹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의 시작이었다.

▶참고자료
  •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씀/이원근 옮김, (평민사, 서울, 2008년)
  • 《제1차 세계 대전사》, 존 키건 씀/조행복 옮김, (청어람 미디어, 서울, 2009년)
  • 영어 위키피디어 - Schlieffen Plan
  • 영어 위키피디어 - Alexander von Kluck
  • 영어 위키피디어 - First Battle of the Marne
[키워드] 제1차 세계 대전, 폰 클룩, 슐리펜 계획, 마른 전투
[분야] 독일, 프랑스, 영국, 전쟁사

[ 같은 날 다른 사건 ]
■ 12년, 로마 제국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Gaius Caesar) 태어남
■ 1864년, 윌리엄 셔먼 장군이 애틀랜타 공략을 시작하다.
■ 1867년, 프랑스 시인·미술평론가 C.P.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사망하다
■ 1870년, 이탈리아의 교육자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출생
■ 1874년, 동물행동과 학습과정을 연구한 미국 심리학자 손다이크(Edward Thorndike)가 태어나다.
■ 1897년, 미국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영사기(Kinetoscope) 특허 취득.
■ 1902년, 미국 반트러스트법 제정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협상 조인하다(영국-프랑스-러시아 3국협상 성립)
■ 1907년, 필리핀 정치가·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출생
■ 1913년, 네덜란드의 축구 클럽 PSV 에인트호번 창단.
1939년, 나치 독일, 폴란드가 독일을 먼저 공격했다며 생떼용으로 위장 공격 사건을 일으키다.
■ 1942년, 독일 6군 스탈린그라드에 진입
■ 1944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방어선인 고딕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하다.
■ 1949년, 반민법 공소 완료. 408명에 소장 발부.
■ 1956년,. 해인사, 국보 석가입상을 도난당하다.
■ 1957년, 말레이시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2년, 대한민국의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 수상.
■ 1962년,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4년, 박정희 정권, 언론윤리법에 찬성하지 않은 5개 신문사에 보복 조치
■ 1967년, 대한민국, 증기 기관차 서울역에서 퇴역식 갖고 디젤기관차로 대체.
■ 1969년, 미국 권투선수 로키 마르시아노(Rocky Marciano)가 죽다. 영화 《록키》 시리즈의 모델이다.
■ 1971년, 대한민국 국무회의, 비적성(非敵性) 공산국가와 교역 허용 의결.
■ 1980년,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설립과 파업을 보장하는 협정서 체결
■ 1983년, 암살당한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장례식이 열리다.
■ 1987년, 대한민국,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8인 정치회담, 직선제 개헌안 협상 타결.
■ 1989년, 동아건설, 세계 최대규모인 리비아 2차대수로공사를 수주(53억달러)
■ 1990년, 동-서독 통합조약 체결
■ 1991년, 키르기스스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 1993년, 대한민국 감사원, `평화의 댐' 특별감사 결과 금강산 댐의 수공위협은 과장됐다고 발표.
■ 1994년, 대한민국 정부, 부산직할시,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를 광역시로 승격하고 울산시와 군을 통합해 울산광역시로 승격.
■ 1994년, 급진주의적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정전을 선언.
■ 1996년, 음성 꽃동네 오웅진 신부, 막사이사이상 수상
■ 1997년, 다이애나 웨일스 공비(Diana, Princess of Wales) 사망
■ 1998년, 북한, 인공위성 광명성1호 발사(서방측에서는 미사일로 추정)
■ 1999년, 한-일합작 세계 최고 쌍둥이빌딩 `페트로나스 타워`가 말레이시아에서 개관
■ 2000년, 대한민국, 한빛은행 등 2차 구조조정 대상 은행 확정.
■ 2005년, 저가항공사 ㈜한성항공, 청주~제주 노선 첫 취항

[ 비슷한 사건 ]


[ 관련 사건 ]
■ 1914년 9월 5일, 1차 마른 전투가 시작되다.


  1. 중립국임을 자처한 벨기에군은 실제로 독일군이 벨기에 영토로 진격해올떄까지는 프랑스군의 벨기에 영토 진입을 "침략"으로 간주했다(《8월의 포성》 197쪽) 이때문에 벨기에군 일부는 프랑스-벨기에 국경 지대에 동원되어 있었다. 게다가 영국군도 의회와 국내 여론을 감안하여 독일군이 확실하게 벨기에 영토를 침략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야 전투에 참여하려 했다.(《8월의 포성》, 177쪽) [본문으로]
  2. 《제1차 세계 대전사》, 141쪽 [본문으로]
  3. 《8월의 포성》, 614쪽 [본문으로]
  4. 성이 "French"이지만, 프랑스어는 하나도 못했다고 한다. 존 프렌치가 프랑스 장군들과 회담할때는 항상 통역이 있어야 했다고.... [본문으로]
  5.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프랑스로 파병된 영국군도 British Expeditionary Force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6. 《8월의 포성》, 618쪽 [본문으로]
  7. 마른 전투가 시작되기 2일 전인 9월 3일에 5군 1군단장 루이 프랑쉐 데스페리(Louis Franchet d'Esperey)가 랑허작을 대신하여 5군 사령관이 된다 [본문으로]
  8. 폰 클룩이 속은 것은 이떄문이었다. 다만, 영국군이 일부러 허둥지둥 후퇴한 것처럼 물건을 버리며 위장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군에 실망하여 존 프렌치는 영국 본토로 철수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9. 《8월의 포성》, 64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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