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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10월 17일] 1961년,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무차별 학살이 벌어지다.


오늘의 역사/10월 2010.10.17 00:00

생미셀 다리에 있는 추모 동판. (출처:위키피디어)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한복판 생-미셸 다리에 30,000여명의 알제리인들이 모였다. 파리 경찰국장 모리스 빠뽕(Maurice Papon)은 파리 경찰에 진압 및 해산을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파리 경찰은 비무장 알제리인을 곤봉으로 때려눕히고 센 강으로 밀어붙였다. 수백명이 맞아 죽고, 수십 명은 센 강에 빠져 익사했다.


1961년 8월 초부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eration Nationale, FLN)은 프랑스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월초까지 FLN의 폭탄 공격으로 사망한 프랑스 경찰은 11명이었다. 그러자 모리스 빠뽕은 10월 5일 야간 통행 금지령을 발표했다. 저녁 8시 30분부터 다음 날 새벽 5시 30분까지 "알제리 무슬림 노동자"(Algerian Muslim workers), "프랑스 무슬림"(French Muslims), 그리고 "알제리의 프랑스 무슬림"(French Muslims of Algeria)이 대상이었다. 이 말들은 모리스 빠뽕이 만든 말로서, 알제리계 무슬림들 중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들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파리와 그 부속 지역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은 대략 150,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965년 10월 17일은 화요일이었다. 파리시에 살던 알제리인들이 파리 외곽 방리유에 모여들었다. 파리 경찰국장 모리스 빠뽕이 내린 야간 통행 금지령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를 조직한 것은 FLN이었으나, 철저히 비폭력 시위를 계획했다. 주최측은 시위 참가자들을 자체 몸수색까지 했다고 한다. 빠뽕은 경찰 7,000명과 공화국 보안 기동대(Compagnies Republicaines de Securite, CRS) 및 국가 헌병대 1,300여명을 동원했다. 경찰은 파리 도심으로 접근로를 모두 봉쇄했고, 11,000여명을 체포했다. 이 중에는 알제리인뿐만 아니라 튀니지와 모로코 이민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3,000명 ~ 4,0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레푸블리끄(Republique) 지하철역에서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 중인 가르니에 궁(Palais Garnier)까지 사고없이 가두 행진에 성공했지만, 이곳에서 경찰에 막히자 다시 물러났다. 렉스 극장(Rex cinema)까지 이르렀을때 경찰이 알제리인을 향해 발포했다. 보조경찰(Auxiliary Police Force)도 공격에 가세했다. 사망자가 발생했고, 시위대는 도시를 가로질러 경찰국 근처 생-미셀 다리(Saint-Michel bridge)까지 몰렸다. 가까운 곳에 노트르담 대성당(Notre Dame de Paris )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다. 경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갈곳이 막힌 알제리인들 수십명이 세느 강에 몸을 던져 익사했던 것이다.

10월 17일은 화요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경찰의 알제리인 사냥은 일요일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프랑스 경찰은 10월 17일 사망자가 3명뿐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98년까지 프랑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사망 7명과 부상 40명이었다. 1998년 프랑스 내무부는 사망자 수를 32명으로 파악했고, 1999년 프랑스 총리실은 10월 17일과 18일 사이에 센강에 버려진 시체를 48명으로, 1961년 한해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운동과 관련해 사망한 인원을 246명으로 파악했다. 장 뤽 에노디는 일요일까지 경찰에게 죽은 알제리인을 200여명으로 추산했다. 반면에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은 1961년 한 해 알제리 독립전쟁과 관련한 알제리인의 희생자를 사망자 200명, 실종 400명, 부상자 2300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마도 영구 미제로 남을 것 같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경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벌받은 경찰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사건 자체가 철저히 은폐되어 1990년대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드골 정권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혜치는 것을 거부하고 철저히 은폐했다. 사건 당일 파리 경찰국이 시체가 센 강(Seine River)에 떠오르자 이 사건을 알제리인들 사이의 패싸움이라고 발표했을 뿐이었다. 1991년, 역사학자 장-뤽 에노디(Jean-Luc Einaudi)가 사건을 파헤친 《파리의 투쟁》을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사건 내막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준 계기는 모리스 빠뽕(Maurice Papon)의 나치 부역자(꼴라보) 재판 과정에서였다.

앞줄 앉은 사람들 중 제일 오른쪽이 문제의 모리스 빠뽕. 1945년 4월 보르도 정부 간부들과 찍은 사진(출처:위키피디어)

빠뽕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보르도(Bordeaux)에서 게슈타포와 협력하여 유대인 1,600여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공(?)을 세웠었다. 이들 중에는 13세 미만 아이도 13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역시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나 다른 유사한 강제수용소였다. 이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1997년 10월 8일부터 반인도 범죄 명목으로 보르도 중죄재판소에 회부됐다. 이 재판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에노뒤가 1961년 사건을 폭로한 것이다. 이 소송은 1999년 10월, 빠뽕이 10년형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으나 당시 87세의 빠뽕에게는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각주:1] . 하지만 1961년 사건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1968년에 알제리 독립 전쟁 중에 있었던 공권력의 과도한 남용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는 사면법을 제정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처음 등장한 반인도 범죄라는 개념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대상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 파리 경찰국은 1961년 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열람을 금지했다. 60년 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1961년을 기점으로 60년을 헤아리면 2021년이 되어서야 관련 자료 열람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료가 그때까지 남아 있을 지 여부는 모르겠다.

지난 2001년, 파리 시 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학살이 자행된 셍-미셀 다리에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 동판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프랑스 우익 정권은 여전히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모리스 빠뽕이 학살을 직접 명령했지만, 그런 권한을 빠뽕에게 준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도 프랑스 우익과 좌익 간에 첨예한 대립을 일으키는 요소다. 1961년 집권자는 샤를르 드골이었다. 이런 사정때문에 동판 하나 세우는 것도 매우 치열한 논쟁거리였고, 심지어 문안 하나를 놓고도 양측은 대립했다. 동판의 위치도 생 미셀 다리가 파리 4구5구의 경계선인데 2001년 당시 5구청장이 우파여서 4구청 관할에 세웠다고 한다. 사건 당사자인 경찰 노조도 1961년 10월 17일 사건을 추모하는 동판의 설치를 달가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판과 상관없이 1990년부터 매년 10월 17일이 되면 생 미셸 다리에서 프랑스 공산당이나 각종 노동운동·시민운동 단체들의 주도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참고자료
[키워드] 알제리, FLN, 모리스 빠뽕, 프랑스, 드골, 파리, 생 미셀 다리
[분야] 정치, 프랑스



  1. 빠뽕은 고작 3년만 복역했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2002년에 석방된 것이다. 그는 2007년 2월 17일에 죽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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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 Comments 9
  1. Favicon of http://goddls1.tistory.com BlogIcon 행인1 또는 甲士1 2010.10.17 09:22 신고 Modify/Delete Reply

    대체 얼마나 많이 죽은건지.... 이런걸 보면 10여년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 BlogIcon 김 종 현 2010.10.18 20:01 신고 Modify/Delete Reply

    김종 현 정수 연 라블훈애적럴
    럭변옺걱랴졷엳고려댣제더려걱얼

  3. 2010.10.20 19:20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4. 보스코프스키 2010.12.01 12:45 신고 Modify/Delete Reply

    그러고 보면 세상의 위선을 감지할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이런 대량학살 같은 참혹사가 아닐까 합니다. 전범재판이든 국제 형사재판이든 대부분 서구인이나 조금 더 나아가더라도 신흥국 인이 피해자인 상황에 한정하니까요... 거기다가 이런 재판일수록 역학 관계가 민감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1968년 사면법 제정 시점이 5월 혁명 발생년도인 것을 본다면 그래도 한 편에선 다행인 점도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제국과 계서 본질이 건재한 점은 정의 획득과정이 지난하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www.discountguccishoes.com BlogIcon Gucci shoes 2011.06.20 17:54 신고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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