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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11월 13일] 1956년, 미국 연방대법원 버스 내 인종차별 위헌 판결


오늘의 역사/11월 2009.11.13 00:00

1956년 11월 13일, 미국 연방대법원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발생한 "로자 파크스 사건"과 관련하여 버스 내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좌석을 분리하여 차별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로자 파크스(Rosa Parks) 사건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퇴근하던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인종 차별을 당한 사건이다.

보이콧 운동 당시 로자 파크스.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마틴 루터킹이다(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을때 평소처럼 유색인종 좌석으로 표시된 좌석에 앉았다. 사건은 백인 탑승객이 늘어나 백인들이 서서 버스에 탑승하게 되자 벌어졌다. 버스 운전사 제임스 F. 블레이크(James F. Blake)가 유색인종 좌석 표시를 로자 파크스가 앉은 자리 뒤로 옮기고 흑인 4명에게 뒷자리로 가라고 요구했다.

로자 파크스가 탔던 문제의 2857번 버스. 현재 포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몽고메리 시는 1900년에 시 조례 하나를 제정했는데, 이 조례에는 버스 차장은 유색인종과 백인 좌석을 분리하여 자리를 이동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상황에 따라 백인-유색인(주로 흑인)을 구분하는 버스 내 좌석을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로자 파크스가 타고 있던 버스 기사 제임스 F. 블레이크는 이 조례에 따라 백인 승객 3명 정도가 서서 가게 되자 유색인종 자리를 빼앗아 백인들을 앉히려 했던 것이다.

3명의 흑인은 기사의 명령에 따라 뒷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로자 파크스는 다른 흑인들과 달리 뒷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창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사가 왜 안일어나냐고 묻자 "내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며 그대로 앉았다. 기사는 즉시 경찰을 불러 그녀를 체포하도록 했고,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의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로자 파크스가 앉았던 자리. 창가쪽에 그녀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원래 자리는 그 옆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 그녀가 앉을 때에는 유색인종 칸이었으므로  전미(全美)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 회장  에드거 닉슨(Edgar Nixon)과 백인 인권변호사 클리포드 더르(Clifford Durr)가 보석금을 내고 12월 2일 저녁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앨라배마 주립 대학교 교수이자 여성 정치 위원회(WPC, Women's Political Council) 회원이었던 조 안 로빈슨(Jo Ann Robinson) 교수와 이 사건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WPC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12월 4일 일요일에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지역 내 흑인 교회들이 동참한다고 발표했다.

지문을 날인하는 로자 파크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당시 경찰의 사건 보고서 (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당시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은 백인전용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흑인들은 주로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 칸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 이용 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었다. 이 칸은 고정된 것은 아니고 표시를 옮길 수 있었다.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으나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으며 버스가 만원이 되면 내려야만 했다. 버스 안에서 흑인이 충분히 평등하게 존중되고 흑인 운전사가 고용되며 먼저 탄 사람이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기로 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몽고메리 시는 12월 8일에 로자 파크스를 질서 파괴 혐의로 기소했다. 그녀에 대한 재판은 30분이 걸렸고, 정식으로 유죄를 판결받아 벌금 10달러와 법정 비용 4달러를 선고받았다. 그녀는 이에 항소하여 무죄와 인종 분리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5일 월요일, 성공적으로 하루 동안의 보이콧 운동을 마친 후 지온 교회에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만들어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흑인들은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목사인 마틴 루터 킹을 협회 회장으로 선출하고 장기 투쟁에 나섰다. 당시 킹 목사는 26살이었다. 흑인들은 버스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다녔으며 흑인 택시 기사들도 버스와 동일한 요금을 받는 것으로 보이콧을 지원했다.

백인들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백인들은 킹 목사와 랄프 애버너시(Ralph Abernathy)의 집에 화염병 공격을 하기도 했고, 버스 수입이 급격히 줄자 시는 킹 목사를 비롯한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제소하여 1심에서 유죄를 이끌어냈다.  킹 목사는 곧바로 항소를 하면서 법정투쟁에 돌입했다.

1956년 11월 13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버스 안에서 흑백 좌석을 분리하여 앉도록 한 몽고메리 시 조례 및 이 근거가 되는 앨라배마 주 법률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명령은 1956년 12월 20일에 몽고메리 시에 전달되었고, 보이콧 운동은 12월 21일에 끝났다.

1956년 12월 21일 버스 앞자리에 올라탄 로자 파크스. 이 자리는 전에 백인 전용 칸이었다. 뒤에 앉은 백인은 사건을 취재하러 온 UPI 소속 기자 Nicholas C. Chriss.



그러나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에 불복하는 백인들이 흑인 교회 등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앨라배마 주는 남북전쟁 이전 노예주로서 남북전쟁 당시에도 백인들을 위한 앨라배마 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던 곳으로 흑인 차별은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1965년 3월 7일에는 흑인 참정권을 주장하며 행진을 하던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했던 사건도 몽고메리 시에서 발생했었다.

11월 13일은 1970년에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을 한 날이기도 하다.

[키워드] 로자 파크스, 미국 흑인차별, 인종 차별, 몽고메리 시
[분야] 인권, 사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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