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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11월 9일]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오늘의 역사/11월 2009.11.09 02:59
1989년 11월 9일 목요일, 동독 정부는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이 날짜는 독일 정치사에서 중요한 날짜다. 1918년에는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하고 SPD필립 샤이데만공화국을 선포했으며, 1937년에는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 암살을 핑계로 나치가 유대인에게 폭력을 벌이기 시작했던 날이다.

[사진01]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1월 9일의 모습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1989년 6월 서독을 방문한 고르바초프는 베를린 장벽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베를린 장벽은 그 명분이 없어지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며 그 결정은 어디까지나 동독 정부가 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개혁 개방 정책을 추구하며 소련을 경제난에서 구해내고 발전시키려 했던 고르바초프가 진심으로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동유럽 국가들이 구 공산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방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 개방 정책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도 큰 압력이 되었다. 더 이상 1956년 헝가리 봉기때나 1968년 프라하의 봄같은 동유럽 공산 정권들을 소련군이 무력으로 지켜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변화는 동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가 서독을 방문하기 한 달 전인 5월 2일, 헝가리 신정부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개방했다. 헝가리군 병사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의 철책선을 제거했다. 이 조치가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에 이르는 시발점이 되었다.

5월 한 달 동안 8천명이 동독을 떠났고, 7월엔 12,000명으로 늘었다. 8월 중순까지 55,000명이 동독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동독 정부가 골치아파하던 정치범들을 슬그머니 서독에 넘겨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7월까지 동독을 떠난 사람들 중 46,000여명은 동독 정부의 비자를 받고 이웃 국가로 넘어간 다음, 그곳 주재 서독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8월 9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동독 주민을 동독으로 강제 송환하지 않을 것이며 여권에 도자을 찍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밀입국 시도를 한 적이 없다고 헝가리 정부가 시미치떼주는 셈이 되어 동독 정부는 설사 그 사람이 동독으로 돌아와도 어떤 법에 따른 처벌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무렵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 대사관은 더 이상 몰려오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폐쇄한 상태였다. 헝가리 정부 선언 후 동독인들은 마음놓고 오스트리아로 국경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번지기 시작하자 동독 정부는 주 헝가리 대사 게르트 페레스(Gerd Vehres)를 보내 헝가리 정부에 항의했지만, 당시 헝가리 외상  귤라 호른(Gyula Horn)은 "당신네 국민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우리 잘못은 아니오"라고 되받아쳤다. 오히려 8월 25일 호른은 본(Bonn)에서 서독 수상 헬무트 콜과 외상 한스 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를 만나 헝가리에 머물고 있는 동독 난민을 강제 송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헝가리는 향후 경제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든든한 파트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9월 초,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 대사관은 동독 주민들에게 새로운 서독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서독 국적법에 대한 연방하원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이 동독인들은 여권 발급과 동시에 서독 국민이 되었다. 이 법은 사실 독일의 유일 정부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뿐이라는 우파의 완강한 고집으로 유지되긴 했지만, 이 무렵에는 거의 옛 시대의 유물 수준이었던 조항이었다. 예전에는 동독인들이 서독 여권을 받아도 서독까지 가지 않으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였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서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등에 묶여 있던 동독인들에게 이 법조항은 구세주가 되었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더 이상은 동독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고,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 발급된 서독 여권을 지닌 동독인들은 자유롭게 "서독 국민"이 되어 두 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9월 5일에 동독 정부가 귀국하면 아무런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동독 국민은 없었다.

9월 10일, 헝가리 정부는 자국 내 동독인들이 어디로 가던지 자기네는 알 바가 아니라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헝가리 정부는 동독 정부와 모든 인연을 끊었다. 이 조치에 따라 처음으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동독인들은 9월 11일 월요일 오전 3시에 오스트리아-서독 국경 마을인 파싸우(Passau)에 도착했다. 9월 10일 ~ 12일 사이에 10,500명의 "새 서독인"들이 서독으로 향했다.

헝가리 정부의 이 조치에 대해 동독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소련의 입장을 궁금해하자 소련 외무부 대변인 겐나디 게라시모프(Gennadi Gerasimov)는 "자기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여 헝가리와 그 이웃 국가들에게 그런 식의 탈출을 허용해도 자기네들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9월 12일에 분명히 했다. 소련은 동독 SED에게 고르바초프 식 개혁을 수행하면 지원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함축하여 전달한 것이다. 헝가리 정부가 동독의 항의에 눈 하나 꿈쩍이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소련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동독 주민들은 헝가리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갈 수 있는 동유럽 국가면 어느 나라든지 찾아갔다.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다. 그 나라들에도 서독 대사관은 존재했고, 각국 주재 서독 대사관은 헝가리 대사관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프라하에서는 체코 경찰과 서독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는 동독인들간에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동서독 합의에 따라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 몰려든 동독인들은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합법 조치로 서독으로 떠날 수 있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고르바초프는 "Wer zu spa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인생은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할 것이다)라는 기념연설을 통해 호네커에게 개혁ㆍ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완고한 동독 정권을 위해 군대를 동원할 의사는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서독으로 탈출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여전히 동독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 중심에 섰던 곳이 라히프치히에서 결성된 Neues Forum이었다. 점점 시위 참가자는 늘어났다. 10월 9일 SED는 라히프치히에서 열릴 예정이던 반정부 시위를 경찰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진압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동독 경찰은 시위에 개입하지 않았다. SED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졌다.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결국 사임하고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서기장 직을 계승했다. 11월 4일에는  시민 백만 명이 동베를린 중앙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도 계속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소련에게도 버림받은 동독 정부와 집권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은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고, 결국 호네커를 출당시키고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취하는 등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크렌츠 신정부는 동독 탈출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다. 11월 3일 크렌츠는 정치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발표하했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자유주의 개혁을 시행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크렌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1월 5일, 15,000여명이 11월 1일에 개방된 체코 국경을 건너 동독을 탈출했다. 새로운 선거법을 만들겠다는 신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동독을 유지하고,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동독 정부는 사람들이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1989년 11월 9일 목요일 18시 55분, 새 정치국원 귄터 샤보스키(Guenter Schabowski)가 기자들에게 "동독의 각 구청에는 영구 출국을 제체없이 허가하도록 방침이 시다로디었다. 영구 출국을 원하는 자는 동독과 서독의 모든 국경 검문소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놀란 한 기자가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는 것인지를 묻자 해당된다고 그는 답변했다.
 

[사진02] 장벽 개방 발표 후 유명한 찰리 검문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동독 시민들. 현재 찰리 검문소는 관광 명소로 역할이 바뀐 채 유지되고 있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이어서 바빠진 사람들은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이었다. 일요일까지 동독군 병사들은 철큰 콘크리트 장벽 여기저기를 무너뜨려 새로운 출입문을 만들었다. TV로 발표문 낭독을 보던 시민들이 믿지 못하면서도 장벽 검문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보았다.
 
그러나 아직 독일 재통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진03] 장벽 붕괴 후, 서쪽에서 바라본 베를린 장벽. 뒤쪽에 보이는 건축물은 브란덴부르크 문이다.(출처 : 영어 위키피디어)

[사진04] 새로운 출입문을 뚫는 공사를 하는 모습.


[키워드] 독일 재통일, 베를린 장벽
[분야] 정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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