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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8월 14일] 1900년, 8개국 연합군 북경을 침공하여 의화단을 진압하다.


오늘의 역사/8월 2010.08.14 00:00

북경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 (출처:위키피디어)

1900년 8월 14일, 의화단에 포위된 북경의 8개국 공사관을 구출하고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의 8개국 연합군 22,000여명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후 2번째 점령이었다. 북경 주재 8개국 공사관은 군인 409명과 민간인 473명, 그리고 중국인 기독교도 3,000여명은 6월 20일부터 55일째 의화단 및 청 정부군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이후 8개국 연합군은 1901년 9월까지 13개월 간 북경에 주둔했으며, 규모도 각국에서 계속 증원군을 보내 10만여명까지 늘었다. 1901년 9월 7일 신축 조약을 체결하여 사태를 수습한 후에도 조약에 따라 외국군은 계속 천진과 북경 사이 요소 요소에 계속 주둔했다.


의화단 운동(Boxer Rebellion)은 가난한 농민들이 중심되어 자발적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운동이었다. 의화단은 본래 무술 단련 모임인 의화문(義和門)이라는 이름으로 1787년에 처음 그 이름을 드러냈다. 통일된 조직은 아니었으며, 지방 마다 따로 조직을 만들어 각자 움직였다. 청일전쟁 패배 후 외세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1890년대 후반 들어 각지에서 반양교운동을 산발하여 벌인다. 처음 시작은 반청복명(反淸復明), 즉, 청나라를 타도하고 명나라를 복구하자는 것이었으나, 1898년을 즈음하여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뀌었다. 이 구호를 사용한 격문 중 가장 처음 등장하는
문서는 1898년 7월 사천 지방의 반양교운동에서 뿌려진 격문이다.[각주:1] 여기서 "양교"는 기독교를 뜻하며 洋은 서양을 뜻한다. 구호가 이렇게 바뀐 것은 청일전쟁 이후 가속화된 외국의 중국 약탈떄문이었다.

1900년 봉기 중 의화단원(출처:영어위키피디어)

특히 산동지방에서 철도를 부설하던 독일의 지나친 행동이 문제를 일으켰다. 독일은 산동 지방을 기점으로 청나라 내륙 지방으로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면서 철도 부지 구입 문제로 중국인들과 충돌을 빚었고, 철도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중국인들의 묘지와 민가를 파괴하여 중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1897년 11월 의화단은 독일인 선교사 2명을 살해했다. 그러자 독일은 이 사건을 핑계로 산동 지방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넓혔다[각주:2]

그리고 의화단도 동시에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두 적대 세력이 동시에 같은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으니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의화단은 산동 반도 바깥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의화단 운동 가담자를 늘려갔다. 그리고 이들은 1900년 4월 경부터 북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기 시작한 6월 말에 북경으로 모인 의화단은 100,000여명으로 추산된다.[각주:3]

청 정부는 의화단에 대해서 의견 통일을 이루고 있지 못했다.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들을 반양교운동은 막되 단속하지 않고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후자는 그러니까 관변단체로 만들자는 것이다. 마치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국방군나치 돌격대 같은 우익 준군사조직 및 자유군단(Freikorps)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아니면 가스통 부대? 아뭏튼 청나라 조정 내부에서 명확하게 대의화단 정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고 의화단이 벌이는 반양교투쟁이 계속 이어지자 서양 열강은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교사와 자신들의 이익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화단은 전국에서 특히 교회부터 불태우고 파괴하고 있었다. 중국인 기독교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경의 55일 동안 중국인 기독교도들이 서양 공사관에 머무르며 함께 한 것도 이런 사정때문이었다.

북경 시내에서 확실하게 눈에 띄는 의화단이 급격히 늘어나자 불안해진 열강 공사들은 5월 21일 청나라 정부에 의화단 활동을 엄히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5월 28일, 북경 주재 외교단은 다시 회합을 가지고 북경으로 군대를 소집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결정 사항을 청 조정과 상의따위는 하지 않고 그냥 통보했다. 5월 30일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4개국 공사는 다시 총리아문[각주:4]에게 군대를 북경으로 불러들일 수 밖에 없다고 다시 통고했다. 서태후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편의 제공을 명령했다. 이윽고 5월 31일과 6월 2일 2차례에 걸쳐 400여명의 8개국 군대가 북경에 도착했다.[각주:5]. 프랑스군 75명, 러시아군 75명, 미군 60명, 영국군 75명, 독일군 50명, 이탈리아군 40명, 일본군 3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 30명이었다.

당시 북경 주재 각국 공사관의 배치도. 여기에는 방어선도 표시되어 있다.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그러나 이들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한 8개국은 6월 10일 증원군을 추가로 부르기로 한다. 증원권을 지휘하게 된 자는 영국의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Hobart Seymour) 해군 제독이었으며 병력은 2,064명이었다. 나라별 병력을 보면, 영국군 915명, 러시아군 315명, 미군 112명, 일본군 52명, 프랑스군 150명, 이탈리아군 4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 25명이었다. 출발지는 천진. 북경까지는 120km 남짓한 거리다. 그러나 이 부대는 북경에 이르지 못했다. 의화단이 북경-천진 간 철도를 파괴하여 철도를 이용할 수 없어서 도보로 행군해야 했는데, 의화단 수만명과 청 정부군이 이들을 저지했다. 결국 1차 증원군은 북경까지 반도 못가고 5일만에 천진의 외국 조계로 물러나야 했다. 6월 16일 청 조정은 대책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서태후는 열강이 계속 무력을 동원하면 열강에 선전포고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6월 17일에 8개국 연합군 해군은 천진 근처 대고 포대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서태후는 6월 21일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각주:6]. 이미 의화단은 6월 20일부터 북경 주재 8개국 공사관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경의 55일"이란 표현은 이 날짜부터 8월 15일까지 따진 것이다.

8개국 연합군의 북경 점령 당시 파괴된 정양문(正陽門)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대고 포대를 점령한 8개국은 7월 14일 천진을 완전히 점령했다. 대고 포대 점령 후 한 달 만의 일인데, 아마 대고 포대를 점령한 부대는 전문 지상군 부대가 아니라 천진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8개국 함대의 수병들로 수병들로 임시 편성한 부대로 점령한 후 증원군을 기다렸다가 천진을 점령한 것 같다. 아뭏튼 7월 22일에 8개국 연합군은 천진을 공동으로 식민통치할 천진도통아문이란 기구를 설립했다. 이 무렵 연합군은 11,000여명이었고, 7월 말에는 34,000여명이 되었다. 8월 4일, 20,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북경 공략에 나섰다. 일본군 8,000여명, 러시아군 4,8000여명, 영국군 3,000여명, 미군 2,100명, 프랑스군 800명, 독일군 2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은 각각 100명 규모였다 지난 번과 달리 충분한 병력과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연합군은 8월 14일 북경을 함락했다.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들을 저지하려던 청 정부군은 와해되었다.

웃긴 건 서태후와 청 조정이다. 서태후의 명령으로 선전포고를 한 후 불과 10여일뒤인 7월 초에 영국, 러시아, 일본 3개국에 화의를 요청한 것이다.[각주:7] 의화단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때였다. 물론 3개국은 화의 요청을 거절했다. 천진 함락을 눈 앞에 두고 있을때였고, 6월 초에 병력도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서두르다가 당하긴 했지만, 청군이나 의화단쯤은 화력으로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월 7일 청조는 이홍장을 내세워 교섭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양측의 화의 협상이 진행된 것은 북경 함락 후였다.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8개국 연합군에 청조는 배상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3일, 8개국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이 참가하여 11개국은 화의대강 12조를 이훙장에게 넘겼다. 서태후는 자신을 처벌한다는 조항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훙장과 혁광에게 그대로 따르라고 지시했다. 대신 의화단 우두머리들과 의화단을 지지한 왕과 대신들은 처벌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몇 몇은 사형당하고 몇 명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대신 의화단 토벌을 주장했던 대신들은 복직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열강과 협상에 나섰던 이홍장도 이미 6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면 안되며 의화단을 토벌하고 외국 공사관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였다[각주:8]. 서태후의 "나만 아니면 되!"는 참 대단하다. 화의대강 12조에 합의한 후 양측은 세부 사항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약 9개월 간의 협상 끝에 1901년 9월 7일, 혁광과 이홍장이 청나라를 대표하여 서명하고 일본을 포함한 서양 11개국이 북경에서 신축 조약을 체결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처형당한 의화단 지도자인 Hsi-Kou의 시체. 시체는 목이 없고, 독일군 병사가 지키고 있다.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역시 처형당한 의화단원들의 모습. (출처:영어 위키피디어)



명칭에 관해서 한 마디 하자면, "의화단의 난"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영어 표현도 Boxer Rebellion이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는 반란이겠지만,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반란은 자국 정부 또는 식민지 통치기구에 반기를 들고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것을 뜻하는데, 서양 열강이 중국인들에게 "자국 정부"일 수는 없지 않는가. 식민지 통치 기구에 대항하는 것도 "반란"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지만, 당시 청나라는 서양 열강의 식민지 상태도 아니었다. 봉기라는 표현도 청 정부와 짝짜궁으로 벌인 일이니 사용하기 좀 그렇다. 대개는 애매한 "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차라리 이게 맞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서안으로 도망친 서태후는 수도를 외국군에 빼앗기고 도망친 주제에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사치를 일삼았다. 청일전쟁때 일본 해군과 싸워야 할 북양해군은 서태후가 연회를 즐기겠다고 해군 예산을 빼돌려 돌로 화려한 배를 만드는 바람에 일본 해군을 압도하는 최신 함포를 갖춘 신식 군함을 가졌어도 포탄이 한 발도 없어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었다. 포탄 한 발 없는 군함을 어따 쓰겠는가? 그냥 항구에 처박아둬야지. 그런 과거를 꺠끗하게 잊은 서태후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와중에도 줄이고 줄였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서안에서 8개월을 지내는 동안 200만량이라는 돈을 썼으며, 북경의 자금성 못지 않은 규모로 서안의 행궁을 개보수하기도 했다. 개념을 밥 말아먹은 자가 나라를 통치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게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빼돌려 포탄 없는 군함을 만들게 한 물건이다. 저거 만드느라 포탄 살 돈이 없었던 북양 해군은 청일전쟁에서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출처:영어 위키피디어)


▶참고자료
  • 《중국 근대사》, 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서울, 1990년
  • 영어 위키피디어 - Boxer Rebellion
[키워드] 제국주의, 의화단, 북경, 8개국 연합군, 청나라, 서태후
[분야] 중국,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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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 근대사》, 245쪽 [본문으로]
  2. 칭따오 맥주가 유명한 것은 이때 산동지방에 자리잡은 독일인들이 맥주 제조법을 전파했기 떄문이다. 아마 자신들이 고향식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중국 근대사》, 247쪽 [본문으로]
  4. 1861년 1월 20일 청나라 정부 북경에서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립했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중국 청나라 말기 외교사무, 외국사절파견, 통상, 해안방어,관세,도로,광산,우정,군사공업,번역,유학생 관리 등을 주관하는 중앙기구이다. 총리아문은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5. 영화 《북경의 55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 전개가 앞뒤를 섞어 놓았다. [본문으로]
  6. 선전포고를 접한 지방의 반응은 달랐다. 서태후의 선전포고령을 무시하는 지방이 많았다. 《중국 근대사》, 252쪽 [본문으로]
  7. 《중국 근대사》, 256쪽 [본문으로]
  8. 이홍장은 청일전쟁의 경험으로 청군 전력으로는 열강을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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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 Comments 2
  1. Favicon of http://goddls1.tistory.com BlogIcon 행인1 또는 甲士1 2010.08.15 15:50 신고 Modify/Delete Reply

    죽은 의화단원들만 불쌍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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