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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역사/한국사 2007.06.10 15:00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고종 8년인 1871년 6월 10일(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으로,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했으나 결국 목적한 통상조약 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목차
* 1 배경
* 2 경과
* 3 평가
* 4 더 읽어보기

1. 배경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조선 원정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결국 1871년 미국은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포함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마침내 조선원정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공사 로우(Low)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에게 해군 함대를 동원, 조선원정을 명했던 것이다.

2 경과
앞서 1866년(고종 6) 7월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사과 및 책임 추궁, 그리고 무력으로라도 통상조약을 체결할 목적으로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Frederik Law)와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해군기함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병력을 싣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 조선 원정에 나섰다.
  • 5월 16일 - 나가사키 출항
  • 5월 19일(음력 4월 1일) - 미군, 남양만에 도착. 이후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시작
  • 5월 26일(음력 4월 8일) - 강화 해협 물치도 앞바다를 함대의 정박지로 결정하였다.
  • 6월 1일(음력 4월 14일) -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 서울로 가는 길목인 손돌목을 지나려다가 강화도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후 미국은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 조선 정부는 미국 함대가 허락 없이 해협을 항해하는 것은 영토침략 행위이므로 협상이나 사죄를 할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 협상 결렬됨.
  • 6월 10일(음력 4월 23일) - 미군 상륙부대는 포함 2척을 앞세우고 해병대원 644명으로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을 점령
  • 6월 11일(음력 4월 24일) - 광성진(廣城鎭), 광성보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600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수와 무기에서 우세한 미군에 맞서 장렬한 전투를 치렀으나 전사자 350명을 내고 결국 패배.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0명이라고 한다.
광성진 전투 후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과 기습으로 곤란했고, 조선은 계속 통상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자세로 나왔다. 더 이상 오래 머물 수도 없었던 미군은 조선과 통상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7월 3일(음력 5월 16일) 40여 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이 기간에 미군 함대가 물치도를 근거지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물자가 서울로 수송되는 수로인 강화 수로를 봉쇄함으로써 서울에서는 식량난이 생기고 물가가 올라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수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단 한 개뿐이었다는 점은 당시 위정자들이 얼마나 무사안일이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척화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지고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3 평가
이 전쟁은 미군의 명백한 실패한 침략이다. 비록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분할이나 식민지에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포함외교 정책에 입각하여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개방과 함께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프랑스(병인양요)에 이어 미국도 조선에 대한 포함외교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의 신미양요는 다른 일반적인 제국주의 침략과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및 식민지배의 시작은 모두 포함외교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그런 평가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및 일본(운요호 사건)과 다른 기준의 해석이 되므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기존 서구 제국주의 침략 수단의 답습이었다. 일본은 성공한 셈이다.

4 더 읽어보기
* 존 로저스 제독
* 프레드릭 로우
* 고종
* 흥선대원군
* 척화비
* 조선의 문호 개방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 안내 : 글은 한국어 위키백과에 제가 올렸던 글입니다. 원래는 예전 홈페이지의 연표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입니다. 이 버전은 2006년 8월 7일 판이며, 내용이 바뀌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은 GFDL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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