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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통합과 독일통일 - 새로운 역사의 시작


독일과 유럽/유럽연합 2009.12.19 14:29
아래 글은 1995년 대학 졸업논문으로 쓴 것입니다. 학부생 수준이 어디 가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저작권은 있습니다. 퍼가시는 것은 좋은데, 이름만 바꿔서 자기가 쓴 것처럼 해서 제출하지 마세요. 옛날에 어떤 학생들이 오타까지 하나도 안고치고 이름만 지들 걸 올렸다가 딱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따위로 대학생활 해가지고 나중에 뭐가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쓰레기 밖에 더 되겠습니까. 출처는 분명히 밝혀주시고, 또한 아래 저작권 표시 분명히 지켜주십시오. "인용"과 "펌질"은 구분합시다. 그거 구분못하고 "불펌"을 "인용"이라고 주장하는 잡것들도 있더군요.

2009년 12월 18일부터 문체와 오타, 띄워쓰기, "~~적"이란 표현을 없애거나 다듬는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목차>
I. 머리말

II. 유럽통합사
1. 유럽통합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1.1 유럽통합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1.2 미국의 대외정책과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2.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시대
2.1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2.2 유럽방위공동체와 유럽정치 공동체
3. 유럽경제공동체(EEC : European Economy Community)와 1965년의 위기
3.1 드골과 1965년의 위기
3.2 위기의 해결과 공동체의 변화
4. EEC의 확대와 유럽공동체(Europea Community)의 설립
4.1 영국과 1960년대의 확대 문제
4.2 유럽공동체(EC : Europeand Community)
4.3 확대
5.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과 정치통합의 추구
5.1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
5.2 정치통합의 추구
6. 1992년 - 마스트리히트조약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


III 독일의 통일과 유럽통합

7. 독일의 분단
8.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9.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10. 1989년,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IV. 맺음말
※ 參考文獻



I. 머리말

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는 지금 지역적 블럭화의 길을 걷고 있다. NAFTA, APEC, EU, ASEAN등의 이러한 지역기구들은 일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중에서도 EU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블럭화의 선구자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하고 있는 여러 지역 공동체들은 좋건 싫건 EC, 또는 EU를 모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EU는 다른 지역 공동체들과 달리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점은 EU가 관심의 초점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과연 그것이 성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의 유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유럽 통합 운동에 대한 연구는 필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유럽통합이 미완성 단계에 있기는 하여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수립된 유럽의 근대 민족 국가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온 유럽인들의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 생활의 근본을 뒤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별로 분리되어 국가라는 틀 안에서 살아오던 삶이 이제는 유럽이라는 지역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때 유럽인들이 느꼈던 당혹감은 여러 차례 나타났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유럽 통합의 역사에 대해 개괄해 보며, 아울러 독일 통일과 관련 속에서 독일 통일이 서유럽 통합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분석해 보고자 한다.

II 유럽통합사

1. 유럽통합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1.1 유럽통합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일반적으로 우리가 유럽 통합 운동으로 알고 있는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 통합 사상이 20세기 중반에 갑자기 발생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그것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각주:1], 18, 19세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미 유럽 통합 사상을 전개한 바 있으나[각주:2], 유럽 통합 운동이 본격 시작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터다.

10세기 이전 유럽은 그리스-로마라고 하는 제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프랑크 왕국의 존재로 하나의 정치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10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3분되면서 유럽의 정치 통일은 깨지고[각주:3], 이후 분할과 이질화가 심화되었다. 지난 1000년 동안 유럽사는 전쟁의 시대였고, 전쟁이 유럽에 가지고 온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것은 반대로 평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그런 사례이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가 곧바로 세계 역사로 인식되었던 시대에 서로의 이해가 상반되는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의 평화안이라는 것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였거나 강대국들간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 유지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 대안이 고작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에 대항한 저항투사들이 전쟁때부터 그들의 통합운동을 바로 이러한 전통과 관점에서 시작하였다[각주:4].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300여 년 간 유럽세계를 지배해 온 근대 민족국가 체제는 더 이상 유럽인의 안정과 번영을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파괴된 유럽을 재건하면서 저항 운동가들은 통합된 유럽이라는 사상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단번에 실현될 수 없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유럽연합'은 전쟁의 엄청난 피해로 야기된 경제난 극복이라는 현실 과제 앞에 수그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엄청난 재산 및 인명 손실을 초래했으며, 따라서 경제 재건이 유럽연합 건설 계획보다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보였다. 유권자들을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기성 정치인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것도 그 한 요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저항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된 통합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와 장벽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정은 전과는 달랐다[각주:5]. 통합론자들의 로비 활동은 전처럼 적극성을 띄지는 않았으나, 많은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좀 더 기능 측면에서 접근 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경제에서 축소된 유럽의 역할, 미국의 경제력,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독일 재건문제, 집단 유럽협력에 대한 미국의 압력, 유럽 각국의 경제난 등이 중요 현안으로 제기되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협조체제'라 하여도 그것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추진하기 힘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 각국은 전시 경제 체제의 평시 체제로 전환과 전쟁 피해 복구라는 두 가지 긴급한 과제 앞에서 새로운 적 소련과, 그리고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또 다른 전쟁(이것을 우리는 냉전Cold War라고 부른다)을 펼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유럽의 새로운 협조 체제를 방해한다면, 그들의 새로운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경제력을 경계하면서도 미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이해를 위해 좋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 추구한 외교 정책은 이후에도 유럽연합의 발전과정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1.2 미국의 대외정책과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새롭게 형성된 국제연합과 유럽 전승국들과 함께 '세력범위정책'에서 폭넓게 협력하고자 했다. 독일을 공동으로감시하는 것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7년에 이르러 미국은 소련과 더 이상 협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후 유럽에는 약화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패전으로 몰락한 독일로 인해 힘의 공백이 생겼고, 미국은 이 힘의공백을 메우고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기를 원한다면 유럽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고하게 할 조치를 취해야 했다. 힘의 측면에서 2차 세계 대전이 준 명백한 영향은 미국과 소련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 다른 국가들을 훨씬 능가하는 범주의 초강국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차대전 종전때와 달리 승자간에 이념적 갈등이 심했다[각주:6]. 특히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더욱 서유럽 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의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계기가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서유럽 통합을 소련봉쇄정책의 일환으로 간주, 서유럽통합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유럽공산화정책에 대해 두려워하던 서유럽인들의 요구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미국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제 단호하고 일관성있게 유럽협력을 강조하게 되었고, 유럽문제에 더 깊숙이 간여하게 되었다. 그리스 내전을계기로 미국은 유럽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은 '트루만 독트린'과 저 유명한 'Marshall Plan'[각주:7]을 발표하게 된다.

트루만 독트린으로 미국은 유럽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임을 천명했다고 보면,마샬 플랜은 실제적인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8]. 전략적·경제적 계획이었던 마샬 플랜에서 중요한 점은, 마샬 플랜을 통해 미국이 유럽국가들과 경제협력체 안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국가들에게 귀중한 경험이 되었는데,유럽통합운동은 이런 경험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원조는 194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이 원조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표현된 정치적 의도에 대한 경제적 보충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마샬플랜은 서유럽을 소련과공산주의에 대항할 이데올로기적인 동맹체로 조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추진된 마샬 플랜을 만족스럽게 수행하기 위해 '유럽 경제 협력 기구 (OEEC : Organization for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전후 초기에 서유럽 정부들이 수용한 일련의 서로 연관된 의무들 중의 한 부분이자 유럽 통합사의 한 부분이다. OEEC에서 우선 시급한 과제는 OEEC 회원국들에게 미국의 원조를 배분하는 일이었다. 일단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이 기구 내에서 서유럽 국가들의 협력 수준은 원래 의도하였던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OEEC는 유럽 통합을 위한 기반 조직이 아니라 정부간 협력기구로 남았다.

대표사례 OEEC의 각료위원회를 들 수 있다. OEEC는 만족스러운 임무 수행을 위해 각료위원회(Council of Ministers)를 구성하였는데, 각료 위원회의 결정은 구속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 구속력은 초국가 권위가 없었다.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을때에만 구속력이 실현될 수 있었는데, 모든 안건에서 만장일치는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각 회원국은 모든 사안에 대해 OEEC의 제안을 거부하거나 무시했고, 때로는 자국의 특수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함으로써 독자 행보를 추구할 수 있었다.

이론상, OEEC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없었다. OEEC는 미국이 원했던 포괄 유럽 재건 계획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OEEC는 주로 GATT와 협력하면서 관세장벽을 낮추는 등의 일부 중요한 분야에서 자유화의 성과를 얻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전부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OEEC는 해결하기 쉬운 문제, 즉, 장기 문제보다 단기 문제에 더 주력하였고, 결국 OEEC의 업무는 초국가같은 유럽통합을 원하는 연방주의자들의 요구에 크게 부응하지 못했다. 1950년대의 유럽공동체 창설자들은 이 OEEC의 경험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이 교훈이란 경제 협력같은 기능 협력을 강화시키면서 점차 경제 통합 그리고 정치 통합까지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1940년대 말 이후 유럽통합에 대한 열정은 높아져갔다. 그러나, 각국마다 입장은 달랐다. 영국은 우선 거의 무관심했다. 그들은 미국과 영연방과 관계에 더 집중했으며, 단지 정부간 협력체 외에는 유럽통합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단지 협력만을 바랄 뿐이었다[각주:9]. 이에 비해 독일은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성을 띄었다. 서유럽으로 통합만이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고, 이웃 국가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독일을 재건시킬 수 있다는 아데나워의 신념때문이었다[각주:10]. 프랑스는 처음부터 유럽통합을 주도했다.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유럽 안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한 독일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말에 성립된 유럽각의(The Council ofEurope)와 유럽총회(European Assembly)는 초국가주의와 국가협력을 추구하는 국가간에 서로 다른 입장을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이 두 기구는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장래모습에 대한 이해대립때문이었다.대륙의 유럽주의자들은 영국과 타협할 자세는 되어 있었으나, 영국은 그럴 의사가 별로 없었다. 문제는 영국과 북유럽국가들이 단지전통적인 정부간 협력의 형태만을 바라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베네룩스 3국들은 초국가적인 공동의 정치적 제도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國家群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럽각의와 유럽총회는 조만간무너질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륙의 6개국은 실제적인 새로운 유럽통합의 길을걷게된다. 1950년 5월 슈만플랜의 발표를 계기로 유럽통합 운동은 보다 협소한 부문에서 단지 6개국만이 참가하는 형태로시작되었다. 급진적인 이상보다 그들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초국가주의 통합을 이루어내고자하는 기능주의적인 통합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2.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2.1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기능주의적 통합방식의 첫 출발은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폴 슈망이 이른바 슈망플랜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슈망은 서유럽의 석탄과 철강 자원을 모든 관련국가들과 새로운 초국가 정부가 공동 행동을 취함으로써 공동 출자되고 관리되어야 한다고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중공업 분야에서 모든 관세를 점차 철페하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었고, 궁극적으로 정치 공동체로 향하는 첫 단계로 간주되었다[각주:11]). 이러한 점에서 슈망 플랜은 석탄과 철강생상의 단순한 협력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각주:12] 슈망의 이 제안에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었던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동조하였다[각주:1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초국가 정부의 창출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그 초국가 기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안해 하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초국가 조직 안에서 참가국들의 이익을 대표할 어떤 권위있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초국가주의와는 대립되는 제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런 제안이 나오기는 했지만, 영국은 여전히 무관심했다. 영국은 초국가적 정부의 원칙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었다. 영국은 노동당이나 보수당 모두유럽대륙국가들의 초국가적 공동체 구성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적극적인 방해 시도를 벌이지는 않았으나, 그냥 무관심했다.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도 영국을 따랐다[각주:14] . 6개국은 오랜 토론과 협상 과정을 거쳐 경제 분야에서는 공동 시장을 형성하고, 정치 분야에서는 초국가 기구의 틀을 창출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고[각주:15], 1951년 4월 18일 6개국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을 우리는 빠리조약 또는 ECSC조약으로 부른다. 빠리 조약은 각국에서 반대에 부딪혔지만, 비준에 성공하였고, ECSC는 1952년 7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다.

ECSC조약의 일반적인 목표는 석탄과 철강의 공동시장 형성을 통해 회원국들의 경제 성장, 고용 증대, 그리고 향상된 생활 수준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ECSC는 우선 관세와 다른 무역제한조처를 제거해야 했고, 그래야만 자유로운 공동시장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추진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ECSC는 몇 개의 기구를 설치하였다. 최고 관청, 공동 의회, 전문 각료 이사회, 유럽 재판소 등이다. 조약 입안자들은 최종 단계에서 ECSC의 구조를 법의 지배 안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유럽통합을 위해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도입하였다.

초기 ECSC는 여론을 도외시함으로써 유럽인의 이상이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이 약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각국정부들이 인기없는 결정사항들을 ECSC에 떠넘겼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태도는 조약의 모호성[각주:16]과 더불어 ECSC의 발전을 더디게 하였다. 6개국 상호 무역이 ECSC 설립 이후 많은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서유럽의 경제 발전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ECSC 덕분인지 명확하지 않다.

ECSC의 어려움은 사실 정치 문제였다. 비록 6개국이 초국가 기구의 설립에 열성이었지만, 여전히 주권을 전체가 아닌 일부라도 이양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17] . ECSC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수립하는 일에 용감하게 전념할 수 없었다. 각국의 반대와 비타협 태도와 싸워야 했으며, 각 국가간에 상이한 국내 정책들과 차이점들과도 싸워야 했다. 실례로 1955년까지 벨기에의 석탄과 이탈리아의 철강은 국가의 보호를 받았으며, 석탄 수입을 차별하는 프랑스의 수입허가제에 ECSC가 승리를 거둔 것은 1961년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ECSC는 다소간 성공을 거두었다. 전체를 봐서 ECSC의 시도들은 과도기간이[각주:18] 끝날 때까지 많은 협력을 제한하는 관행들을 제거함으로써 경제 경쟁력의 토대를 강화했다. 또, ECSC는 노후한 석탄·철강 공장에 대한 경제 쇠퇴의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동의 목적을 위해 각국의 이익을 무시함으로써 회원국들의 불만이 가중되었고, 초국가기구의 한계성이 1959년에 명확히 드러났다. 그 직접 원인은 따뜻한 겨울과 완만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초래된 막대한 잉여 석탄에 ECSC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원국들은 ECSC국가들을 포함하여 석탄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 때문에 공동시장이라는 ECSC의 목표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초국가기구가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ECSC는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유럽통합이라는 이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단일 경제 부문에서조차 행동을 조화시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1959년의 공동체 위기는 앞으로 계속 나타날, 그리고 제기될 유럽 통합 운동의 어려움의 전조였다.

경제 위기가 ECSC의 권위를 손상시켰지만, ECSC는 단순한 경제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최종 정치통합을 실현하게 될 부문 통합의 첫번째 구성 단위였다. ECSC는 표면상 정치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않았다. 초국가주의 실현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지도 않았으며, 각국 정부와 의회에 대해 명확한 권위를 확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CSC는 유럽통합을 향한 동력을 창출해냈고,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통합 논쟁을 자극했다. 유럽재판소의 경우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래를 위한 기초를 탄탄히 잡아놓았으며, 여타 공동체의 발전을 자극했다.

ECSC의 설립동기로서 중요한 사항은 회원국들 사이에 상호신뢰의 분위기를 창출했다는것이다. 이것은 특히 서독과 프랑스의 화해를 의미했다[각주:19].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특정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해결하며협력을 강화하고, 이에 기반하여 다른 문제에도 협력을 확대하면서 점진적 통합을 이루는 기능주의적 방법이 모색되었다. ECSC의공헌도는 무엇보다도 회원국들의 지도자들 사이에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확립한 데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논쟁을 치루면서도 결코공동체를 떠날 생각을 하는 지도자는 없었다.

2.2 유럽방위공동체와 유럽정치 공동체

Paris조약이체결되고 나서 이와 비슷한 계획을 도모하는 여러 사상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들은 ECSC에 기원한 것은아니었고, 주로 유럽각의와 OEEC에 의해 촉진되었다. 그런 예로 본느푸계획으로 알려진 '유럽운송공동체', 농업부문의 플링린계획등이 있으나 어떤 실질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ECSC의 초기 경험을 바탕으로 일부 사람들은 부문별 통합전략보다 전체경제의 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통합을 위한 새로운 관심의 초점은 경제부문이 아닌 방위정책문제에 모아졌다.

공동방위정책이 제기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미국은 점증하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의 재무장을 주장했다. 서독 역시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임무에 서독 대중을 참여시키는 방법은 그들에게 서유럽 방어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면서 서독 재무장을지지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이웃 국가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서독이 재무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고있었고, 동시에 미국의 압력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당시 유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과거 독일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프랑스가 들고 나온 것이 플레뱅 플랜이라고 알려진유럽방위공동체(EDC : European Defese Community)였으며, EDC의 성공을 위해 공동의 외교정책을 주관할유럽정치 공동체(EPC : European Political Community)가 뒤에 제안되었다.

이 계획에영국과 북유럽국가들이 불참을 공식화함으로써 EDC계획은 ECSC의 6개국에 한정되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공동방위'라고 하는위상이 약화됨을 의미한다. EDC계획에 함축된 바는 ECSC의 것보다 더욱 커서 초국가주의적 통합에 한발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ECSC와 EDC는 달랐다. 특히 중요한 점은 EDC에서 회원국들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문제의 초점은서독이었다.

EDC조약에 따르면, 서독은 군대를 가질 수는 있으나, 모든 서독군의 지휘는 통합 지휘부에 넘겨야한반면, 기타 회원국은 단지 군대의 일부만을 할당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설령 EDC계획이 성사되었다고 할지라도서독이 가만히 두었을지는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아뭏튼 여러 가지 부가의정서와 관련하여 이 조약을 대하는 프랑스의 태도는 점점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소련보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안보를 보장하려는 책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EDC계획이지지부진한 가운데 서독 수상 아데나우어는 통합된 외교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통합유럽군을 창설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지적하였다. 통합주의자들에게 새로운 활력이 불여넣어졌다. 그들은 새로 통합된 외교정책을 수행할 EPC계획을 들고나왔다. 이로써정치통합에 한발짝 더 다가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EPC계획은 EDC계획을 보완하는 것으로 EPC의 성공여부는 EDC계획이성공하느냐에 달려 있었던 문제였다. 그리고, EDC계획은 프랑스 의회의 비준여하에 달려있었다.

프랑스가EDC계획을 진심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통적인 프랑스의 두려움을 반영했을 따름이었다. EDC의 주목적은 서독재무장의 저지였다. 미국이 압력을 가하고, 서독과 베네룩스 3국이 조약을 비준한 가운데, 프랑스 의회는 조약 비준을 거부하였다.EDC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따라서 EPC계획도 사장되었다[각주:20] .

이로 인해 통합운동에 가해진 피해는심각했다. ECSC만이 살아남았고, 다시 사람들은 부문별 통합에 관심을 모았다. EDC 및 EPC의 좌절로 야기된 문제는 역시방위문제였다. 그 대안으로 1948년에 체결된 브뤼셀조약이 확대되어 서유럽동맹(WEU : Western EuropanUnion)이 결성되었다[각주:21]. 그러나, WEU는 단지 정부간 협력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1980년대에 재생될 수 있을정도로 미약한 존재였다.

EDC와 EPC계획의 실패로 통합주의자들은 크게 낙담하였으나, 그들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것은 아니었다. 모든 회원국들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진전도 이룰 수 없는 OEEC의 제한성과 당시 국제 무역 형태는 통합의명분과 폭넓은 경제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그 필요성은 1955년의 메시나회동과 1957년의 로마조약을 거쳐 새로운공동시장을 창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3.유럽경제공동체(EEC : European Economy Community)와 1965년의 위기

로마조약 입안자들이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던 유럽통합의 목표는 경제통합을 수단으로 한 정치통합이었다. ECSC와 같은 부문별접근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ECSC는 복합산업경제의 한 부문인 석탄과 철강산업부문에서만 통합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그리하여 타경제분야로부터 고립된 가운데 통합의 궁극적 목적은 달성될 수 없었다. 원자력공동체인 Euratom은 이러한 부문별접근방식을 통한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재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조약으로 탄생한유럽경제공동체(EEC : European Economy Community)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 힘과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6개국은 장기적 안목에서 통합기구를 추구함으로써 OEEC와 경제적 이해충돌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낙관했다. 단기적인 안목에서는 통합추진은 6개국의 대내외적 정치·경제적 요인들의 연관 속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EEC는 가능한더욱 많은 이익집단과 단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 이해관계의 발전을 통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꾀하였다.

EEC가 당면한 일반적인 목적은 로마조약에 규정된 대로, "공동시장을 창설하고, 회원국들의 경제정책을 발전적으로 근접시킴으로써공동체를 통하여 경제활동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하고, 지속적이고 균형을 갖춘 경제성장, 안전성의 증대, 생활수준 향상의 가속화,그리고 회원국 내의 밀접한 결속을 증진시킨다" 였다. 이러한 목적들이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기는 하나 정치적 목적이 배후에깔려 있었다. 필연적으로 로마조약은 매우 방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이 없이 일반적인 원칙만을 공표함으로써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모호함이 있었다. 이러한 모호함은 훗날 심가한 논쟁을 야기하게 되었다.

EEC초기에는 경제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EEC 성립과 초기의 발전은 우호적인 정치적, 경제적 환경에 의해 고무되었다고 할 수있다. 1957년이후 몇년 동안 EEC발전에 대해 EEC의 결성을 지원한 모든 사람들은 만족했다. 역외국가들은 이러한 점에주목하였고, 성공적으로 운용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와 터키가 1959년에 준회원국 가입신청을 했고, 1961년에는 영국이자세를 바꾸어 가입신청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EEC는 서유럽 통합의 중심기구가 되어갔으며, 현대 서유럽사는 EEC의 활동과 그활동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반응이 주요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EEC의 앞날이 결코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EEC발족 후, 10년을 일종의 황금기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화된 시각이고, 이때까지 EEC가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아뭏튼 EEC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고, EEC의 목적이 달성되어가자 점차 회원국들 사이에 의견대립이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의견대립은 1965년 이른바 '빈 의자 empty chair'위기로 그 절정에 달했는데, 드골의프랑스와 여타 5개국간의 로마조약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3.1 드골과 1965년의 위기

1958년 5∼6월에 발생한 프랑스의 정치 위기는 드골이 정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골의 정계복귀는 프랑스 국내 정치의 변화와더불어 유럽통합의 과정에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그것이 1965년의 '빈 의자'위기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위기이다.표면상 1965년의 위기는 공동농업정책(CAP)와 그것과 관련된 공동체의 제정문제에 대한 프랑스(정확하게는 드골)와 여타5개국의 충돌이었다. 그 이면에는 '초국가주의에 입각한 통합'과 '국가연합의 유럽'이라는 두 사상의 대립이 있었다.

드골은 '국가중심의 유럽'과 '유럽인의 유럽', 즉 미국을 배제한 유럽국가들로만 구성된 유럽을 지향했다. 드골은 그의 관점에 따라유럽의 정치협력을 제안하였다. 정치협력의 필요성은 다른 5개국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즉,NATO 차원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순수히 유럽차원에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 드골의 구상대로 미국과소련 사이에서 유럽이 제 3의 블록을 형성한다는 것인데, 유럽은 그럴만한 힘과 수단을 갖지 못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5개국은 초국가적 유럽기구를 통한 유럽과 미국의 원조와 방위참여가 보장되는 NATO내에서 정치협력으로 기울어 있었다. 대립은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 드골은 정치통합을 다른 회원국들에게 제안하였고, 드골의 제안을 연구하기 위해푸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61년 11월, 푸셰위원회는 '국가연합 union of states'을 설립하기 위한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은 4가지 제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첫째, 정부수뇌 또는 외상들이 정기 회합을 가지고 만장일치로 의사 결정을 한다. 둘째 파리에 주둔하는 상임사무국 또한 각국의 외무부 고위 관료로 구성하여 정부 간 협조의 성격을 띠게 한다. 셋째, 외교, 방위, 상업, 문화 분야의 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네 개의 상임 정부 간 위원회를 가진다. 넷째, 유럽 의원 총회의 의원들은 각국의 의회에 의해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1962년 1월 18일, 푸쉐 플랜 개정안이 제출되었다. 개정안에서는 핵섬 부분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 전문에 들어있던 NATO와 관계 설정에 대한 내용 삭제, 유럽 이사회의 경제 분야로 권한 확대, 그리고 신규 가입의 만장일치 허가제[각주:22] 등이다.

드골이 구상하는 유럽이란 결국 현존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하향조정하고, 공동체에서 모든 초국가 성격을 없애며, NATO의 체계를 뒤흔들어놓으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한 마디로 기존의 공동체 기구들의 존재와 운영에 커다란 위협이 되리란 것이었다[각주:23]. 종국에는 공동체를 정부 간 협력기구로 재편할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드골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다른 5개국들, 특히 서독과 이탈리아는 EEC와 NATO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으며, 프랑스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푸셰 계획에 반대하였다. 이 시기에는 영국의 가입 문제가 함께 걸려 있었는데, 베네룩스 3국들은 이 계획에 대한 논의를 영국 가입이 해결될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EEC 내의 세력 균형을 위해 영국 가입을 희망하고 있었다. 4월말, 푸셰 계획은 협상이 결렬되었으며, 드골은 공동체를 "무국적"이라는 말로 맹렬히 비난했다[각주:24]. 뒤이어 1963년 1월에 드골은 영국 가입을 거부하였다[각주:25].

드골의 거부권 행사는 공동체 내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거부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드골이 거부권을 행사한 방식에 다른 5개국들은 분노하였다. 모든 회원국이 가입 신청자에 대해 토의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기자 회견 방식으로 독단으로 거부해 버린 것이다. 불만은 쌓여 갔다. 대립과 충돌은 공동농업정책(CAP : Common Agricultural Policy)과 재정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분명하게 표면화되었다.

드골이 추구한 '국가 연합의 유럽(Europe des Parties)' 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EEC계획이 지연되어야 했고, 프랑스는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푸셰 계획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푸셰 계획은 실패했고, 아데나우어의 후임인 에어하르트는 프랑스보다 미국을 선호하였다. 드골의 로마 조약 해석이 기존의 해석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6개국은 로마 조약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노력이 초국가주의에 입각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정부간 협력체로 남을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드골의 프랑스는 후자를 선택하였고, 다른 5개국은 전자였다.

1965년에 표면화된 문제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유럽 의회의 EEC예산에 대한 실질 권한 확대, 두번째는 EEC의 독자 예산마련, 세번째는 공동 농업 정책이다. 5개국들과 집행위원회는 공동 농업 정책과 재정 문제를 연관지어 일괄 타결을 시도했고, 프랑스는 농업의 안정을 바라면서도 무국적의 초국가기구에 자국의 예산 통제권과 자원 통제권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EEC가 CAP에 대한 재정 조치에 합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프랑스는 각료 이사회에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빈 의자 empty chair'위기이다.

드골은 무엇보다도 일괄 타결안에 내포되어 있는 초국가 요소와 정치 의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드골은 공동체 구조의 핵심 내용을 공격하면서 주권 국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유럽을 계속 추구하였다. 11월, 프랑스는 로마 조약 개정을 포함한 공동체의 완벽한 변혁을 주장했고, 프랑스의 반초국가주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입장에 대해 다른 5개국은 양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고, 드골 역시 이에 강하게 맞대응했다 [각주:26]. 1965년 말에는 공동체가 해체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결정과 지침이 필요했다. 5개국들은 자신들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든가 아니면 양보해야 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프랑스가 5개국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허용할 경우, 5개국은 영국을 가입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프랑스는 복귀해야 했다.

3.2 위기의 해결과 공동체의 변화

1965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EEC의 여타 5개국은 프랑스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공동 전선을 펼치게 되었다. 10월 26일에 5개국은 프랑스에 공동체로 복귀를 종용하면서 문제의 해결은 조약과 (공동체) 기구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분명히 못박았다[각주:27].

1966년 1월 룩셈부르크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회담이 개최되었다. 프랑스는 더 이상 공동체 조약 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각주:28]. 대신, 가중 다수결 제도의 폐지, EEC 위원회의 역할 축소, 프랑스의 이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분야에 대한 공동체 업무 일정표 작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은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 크게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에, 프랑스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가중 다수결 표결제도는 광범위한 사용이 금지되었다. 단 EEC 위원회는 그 역할과 독립성을 거의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프랑스의 파업으로 6개월간 마비 상태에 있었던 공동체의 업무들이 빠르게 재개되었다. 구조 위기라는 심한 몸살을 앓으면서도 CAP와 공동시장의 완성을 통해 EEC는 그 발전의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ECSC,Euratom, EEC의 공동체 집행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7년 7월부터 업무에 들어간 이단일위원회가 유럽공동체(EC : European Community)이다.

유럽통합의 이행 과정에서 발생한 이첫번째 중대 위기와 그 수습을 위해 나온 룩셈부르크 타협안의 결과로 차후 공동체의 발전은 많은 궤도 수정을 요구받게 된다. 룩셈부르크 회담을 통해 드골은 5개국 위에 군림하는 것은 실패했으나, 공동체 내의 초국가 요소는 줄어들었다. 이것은 사실상 드골의 승리였다. 이제 그들은 국가 이익에 치명같은 악영향을 초래할 문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집행위원회보다 각국 정부의 역할이 더 증대되었다는 것이다[각주:29] . 이제 집행위원회는 일부 회원국의 지지만으로는 더 이상 혁신 제안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전 회원국의 승인을 얻어내가 위한 타협하는 듯한 신중한 제안을 하는데 그칠 수 밖에 없었고, 발전은 그만큼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각주:30] . 덧붙여 말할 것은, 이제 로마조약에서 언급된 '정치통합'은 사실상 봉쇄되었다는 점이다.

4. EEC의 확대와 유럽공동체(Europea Community)의 설립

4.1 영국과 1960년대의 확대 문제

EEC는 영국의 참여 없이 형성되고 발전하였는데, 그것은 영국이 초국가 원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통합으로 실제로 발전하게 되면서 대륙 유럽과 관계에 대한 영국의 구상은 뒤흔들렸다. 1955년 로마 조약을 위한 메시나 회동 이후 영국은 유럽 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EDC의 실패 이후, 영국의 대유럽접근은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그것은 'WEU', '대계획 Grand Design', 그리고 '유럽 자유 무역 연합 EFTA'이다.

영국은 EEC를 위한 토론이 진행중일때 EEC를 포함한 폭넓은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이것이 '대계획'이다. 당시 영국은 메시나 계획이 EDC처럼 실패할 것으로 보았다. 사실 영국의 제안은 유럽통합을 방해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영국은 6개국을 포함하여 OEEC 국가들을 자신의 견해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시대착오였다. 1950년대 초라면 몰라도 영국이 6개국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영국의 제안은 너무 늦게 나온 것이었다.

1957년 7월 좀 더 폭 넓은 자유무역지대를 서립하기 위한 영국의 제안을 협상하기 위해 영국 수상 맥밀란은 모들링을 영국 대표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모들링위원회가 발족한 1957년 10월에는 이미 로마 조약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6개국은 영국의 대계획을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보충물로서 보았다. 영국의 전략은 공업 재화의 자유로운 유통을 위한 자유 무역 지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농업은 배제되었다. 영연방과 관계때문이었다. 영국은 유럽과 영연방에서 최상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EEC는 영국의 제안을 유럽 통합에서 퇴보단계로 보았고, 그들은 영국의 제안을 토론하기는 했으나, 결론은 거부였다. 1958년 자유 무역 지대에 대한 협상은 드골의 프랑스에 의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모들링 제안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59년에 영국은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포루투칼, 스웨덴, 스위스와 함께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 :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EFTA는 EEC와 달리 긴밀한 경제 통합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경제 목표는회원국 간에 공산품에 대한 관세 인하와 더 나아가 관세 제거였다.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EFTA는공동 역외 관세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공동 역외 관세는 로마 조약의 핵심이다.

1950년대가 끝나자 유럽은 이념 분열에 이어 또 다시 EEC와 EFTA로 분리되었다[각주:31]. 두 조직은 따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럽국가들이 통합 또는 재휴의문제에서 그들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데 10년이 걸렸다. 1960년에 EEC회원국들은 최대한의 통합을 추구하고, 나머지 국가들이정부간 최소한의 연합을 형성하는 선호하는 경향은 당분간 끈질기게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래가지못했다. 1961년 7월 영국의 맥밀란 수상은 EEC 가입의사를 표명했다. 영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덴마크, 아일랜드,노르웨이도 같이 가입신청을 했다. 영국 자신이 EEC와 세력균형을 위해 설립한 EFTA가 발족한 지 겨우 2년만에 태도를 바꾼것이다. 영국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는 명백하다.

EFTA는 영국에게는 너무나 작은 시장이었다. EFTA는 결코 영국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임시기구였다. EEC가 구축할 관세장벽의 외부에 남아서 입게될 손해는 EFTA로는 도저히 보상받을 수없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연방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 추세였다. 미국은 분명하게 EEC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고[각주:32], 영연방은 영국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EEC의 계획이 성공하고, 영국이 EEC 밖에 남아있는 한 영국의 정치 영향력과 경제 이익은 계속 감소할 것이었다. 영국이 참가 결정을 늦게 할수록 만족스런 조건을 얻기는 더 어려워지고 회원국에 적응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었다.

영국은 1차 EEC 가입신청서를 1961년 8월 10일 브뤼셀에 제출하였다[각주:33]. 영국은 영국 농업의 이익뿐만 아니라 EFTA 국가들과 그리고 영연방과 특별 관계를 계속 주장하였다. 영국은 아직 EEC가입에 대한 절대 의사는 없었고, '필요한 것' 정도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태도는 EEC회원국들로부터 영국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베네룩스 3국들은 EEC 내의 프랑스-독일 축에 맞설 수 있는 세력 균형으로서 영국 가입을 환영하고 있었지만, 유럽통합에 대한 영국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영국의 의도가 임시방편의 편의 추구에서 나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우려는 아직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협상 과정에서 영국은 영연방과 EFTA국가들과 관한 특권을 주장했고[각주:34], 또 한편으로 농업부문에서 예외 특혜를 부여해 달라고 주장했다. 특히 후자는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결국 영국의 입장은 지원자라기보다는 수혜자가 되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EEC 내 회의론자들은 영국의 EEC 가입 의도에 대해 더욱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영국의 가입은 드골의 거부권 행사로 거부되었다 [각주:35].

가입신청이 거부된 영국은 당분간 EFTA에 주력했다. 그러나, 영국은 1967년에 또 다시 가입신청을 하게 되었다 [각주:36]. 1967년의 가입신청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이번에도 또 다시 드골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되었다.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한, 영국의 가입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4.2 유럽공동체(EC : Europeand Community)

로마 조약 체결 이후, 6개국은 EEC가 어떠한 구조적 성격을 지녀야 하는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제기하였다. 그런데 1965년의 위기를 해결하면서 공동체는 정부간 협조주의를 향한 방향이 정해졌다. 적어도 EEC는 독립적인국가의 연합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형태의 공동체에 대한 추구는1970년대의 발전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경제는 각국간에 서로 밀접히 상호 연관되고, EEC의 역내무역은1958년 이래로 역외무역에 비하여 거의 3배 가량 늘었다. 그리고 1965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에서는 유럽통합에대해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국제사회에서도 EEC는 6개국의 하나의 공동입장으로 행동하면서 상당한 정도의 대외협상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야운데협정과 케네디라운드에서 EEC의 이름으로 협상대표를 파견한 것등이다.

대조적으로 공동체 내의 발전은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했다. 경제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정치통합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미래에 영향을 끼치게될 견고한 기반들이 점진적으로 성립되어 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공동농업정책(CAP)이다. 공동농업정책은초기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1968년에 이르러서야 정책의 개요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공동농업정책은 소비자를 무시한 정책임생산의 안정화에도 실패하고 가격 상승을 유발하여 모든 부담을 납세자에게 전가하였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앗고, 1970년대초에이르러 공동체 내에서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정책이 되어버렸다. 1973년 이후, 확대된 공동체 안에서, 특히 영국에 의해공동농업정책의 존속 여부와 합리화 문제는 계속하여 심각한 논쟁의 주제가 된다.

1965년의 위기가 공동체 내의기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국 정책 간의 협상과 타협을 통하여 타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집행위원회는아직 각료이사회에 앞서 정책 시행과 의제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갈수록 중요한 의제는 각국 정부에 의해제기되고 시행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집행위원회의 정치적 결정권이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1967년7월, ECSC, EEE, Euratom이 합병되어 유럽공동체(EC : European Communities)로 재편되면서 새로구성된 집행위원회의 레이의장은 중재자로서 각국의 입장들을 타협시키고, 균형있게 조화시키며, 각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정책만을 수행하였다. 집행위원회는 아직도 초국가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잠재력을 현실적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특히 정치적인 결정을 요하는 문제에는 적절한 해결책을제시하지 못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공동체가 신속하고 합리적인 미래 지향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모순으로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점점 EC내에서 정부간 협조주의가 중요한 성격으로 부각되었다. 프랑스 대통령퐁피두는 6개국의 정기적인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각주:37]. 그 첫 회담이 1969년 12월, 헤이그에서 얼렸다. 이 회담을통해 회원국 확대를 위한 길이 열리게 되었고, 공동체의 정책 발전에 대한 지침이 확립되었으며, 궁극적 목표인 정치통합에 대한신념이 재확인되었다. 정부수반들의 회동과 합의를 통하여 공동체의 앞길에 청신호가 주어졌다는 것은 EC를 이끌어 가는 힘이 어디에있는가를 분명히 한 것이었으며, 1970년대에 전개될 새로운 의사결정 방법에 대한 전조를 보여주게 되었다. 즉, EC의 장래는정부 수반들의 협조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EC의 원동력이 초국가주의보다는 민족주의적 힘들의 이해관꼐의 절충을 통해구해진다는 명제를 성립시켰다. 이후 추진되는 공동정책들은 이렇게 각국 정부들의 타협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헤이그 회담의 목적은 EC를 재충전시킬 뿐만 아니라, EC가 확대된 후에도 정체되거나 본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EC를 확고한토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1972년의 파리 정상회담과 1973년 코펜하겐 정상회담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기간 중 EC는 정치적 협력을 모색하고 여러 정치적 목표를 수립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계속 나빠질전망이었으므로 경제통합이라는 목표의 달성은 불투명해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 초강대국들이 긴장완화를 논의할때,그들은 서유럽의 목소리를 귀담아 뜨지 않앗다. 그래서 서유럽 각국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가 그 해당 국가들과상의도 없이 초강대국들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EC는 이제 정치통합이라는 최종목표에 관심을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EC 구조 밖에서 각국 간에 정치적 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1970년다비뇽보고서는 외무장관들로 구성되는 정기적인 협의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보고서에서 제안된 사항은 EC의 제도적 틀밖에서 별도로실현되었다. 이것은 EC의 장래 발전에 대한 조짐을 보여 주고, 각 나라들의 실질적인 중요성을 반영했다. 즉, 이것은 각 국가가EC전체를 위히기보다는 각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치적 협력은 정기적인 정보 교환과 토의를 통하여,국제정치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각국의 의견을 조화시키며 협력을 촉진하고, 그리고 특정문제에 대한공동의 접근을 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결과 '유럽정치협력(EPC : European PoliticalCooperation)'이라는 명칭이 탄생되었다.

이와 같이 협력이 진행되면서 다른 나라들은 국제 정치 제도속에서 하나의 중요하고도 단일한 정치 행위자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또 EC가 점점 국제적 조직과 회담에 단일 대표로 참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4.3 확대

1969년 드골이 대통령에서 사임하자 영국은 가입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영국의 가입 여부를 결정할 열쇠는 여전히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 퐁피두는 아직도 영국의 가입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나, 공동 농업 정책을 위한 새로운 재정 충원 제도에 대한 다른 EC국가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영국의 가입을 승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또, 프랑스나 서독 모두 영국을 상대방에 대한 세력균형의 카드로 고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영국은 1972년 1월, 브뤼셀에서 회원 가입 조약에 서명을 하고, 1년영국은 10여년 간의 인내 끝에 정식으로 EC의 회원국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아일랜드와 덴마크가 가입하여 EC회원국은 9개국이되었다. 노르웨이는 심각한 국내 정치분열만 남긴채 가입을 거부하였다.

EC 확대에 따라 EC와 EFTA간에도특별관계협약이 맺어졌다. 1972년 6월 EC와 EFTA의 16개국은 자유무역지대를 설정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이 협약은 철저한호혜주의에 입각한 무역협정이었다. 이러한 조약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서유럽내의 EC와 EFTA 간의 반목을 종식시키는것이었고, 서유럽에서 구심점은 EC가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장래의 EC 확대를 위한 확고한 기반을구축하였고, 핀란드와 협정을 제외한 모든 협정들은 상업분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타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해석의여지를 남겨놓았다.

두번째 확대는 1981년에 그리스의 가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이미 1962년에준회원국으로 가입한 상태였으나, 군사정권 기간동안 그 협정은 중지되었다. 1974년 11월 새로운 민간정부가 들어서자 그리스는정식 회원국으로서 1975년 6월에 EC가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집행위원회는 그리스의 가입신청에 신중해했다. 그리스가 가입함으로써 야기될 경제문제 때문이었다. 집행위원회의 신중함에 대해 각료이사회는 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결정하였다.

그리스, 포루투칼, 스페인의 가입신청은 EC에 남북 유럽간 경제 균형 문제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스의 가입신청은 매우 순조로운 편이었는데, 갓 태어난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 행정부가 매우 열광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EC도 동의하였다. 이것은 스페인과 포루투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스페인과포루투칼의 가입에 대해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하였다. 영국은 EC를 12개국으로 확대하면서 시장도 넓히고 프랑스의 주도권약화를 노렸고, 프랑스는 공동체의 첫번재 확장을 마무리부터 짓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1982년에 시행된 개정 예산 체계를도입하기 위해 1980년 5월에 체결된 협약과 영국의 EC예산 기여에 대한 영국 및 여타 EC 회원국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EC 확장으로 인해 프랑스 농업에 야기될 문제점에 대한 걱정이 지스카르 데스텡의 담화문 뒤에 숨어있었다[각주:38] 그러나, 그리스의 예처럼, 스페인과 포루투칼도 막 태어난 민주주의를 지원한다는 명분때문에 프랑스도 그들의 가입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스페인과 포루투칼은 EC 가입조약에 서명하였다.


5.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과 정치통합의 추구

5.1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

1970년대 이후, 유럽통합 노력은 유럽통화제도와 정치통합에 집중되었다. 공동농업정책과 지역정책 등 많은 정책이 수행되었지만, 모든노력은 유럽통화제도(EMU)로 이어졌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유럽정치협력(EPC)이 가속화되었다. 공동농업정책, 사회정책,지역정책등의 문제들은 재정문제로 항상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통화제도의 필요성을 공유하게되었다. CAP에 나타난 재정조달방식의 변화[각주:39] 는 보다 효과적인 통화기구를 설립할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1969년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1980년에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inon)을 창 설하기로합의를 보았고, 1970년 3월 6일에 모든 회원국들의 중앙은행장들과 협의하여 EMU에 대한 여러 가지 안을 검토할 베르네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동년 10월 17일에 제출된 베르네 보고서는 EMU의 실현을 위하여 공동체의 대규모 개혁을 제안했다.첫째는 국가차원이 아닌 공동체 차원의 경제 통화 정책을 결정할 독립된 유럽 중앙 결정기구의 창설, 두번째로 미국의 연방화폐 보유시스템을모델로 한 공동체 시스템의 중앙은행설치였다.

동년 10월 29일에 각료이사회에 제출된 집행위원회의 제안은 베르너 보고서보다 훨씬 신중했지만, 회원국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각했다. 특히 모든 부담을 지기 꺼려하던 서독과 초국가기구 창설을 결사 반대하고 있던 프랑스때문에 대립은 심각해졌다. EMU에 대한 견해가 달라 난항을 거듭하던 협상은 이듬해인 1971년 2월 9일에 가서야 겨우 타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타협에 성공하여 이제 막 실행에 들어가려던 EMU는 석유파동으로인한 국제적인 경제불황과 통화위기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70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시작된 국제통화위기 앞에EMU를 위한 첫 프로그램은 실행도 해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미국의 횡포로 빚어진 국제통화질서의 대혼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있던 EEC였지만, 서로가 처한 상황의 차이와 유럽 고유의 통화시스템의 결여로 공동체 차원의 대응이 어려웠다. EEC 국가들은경제통화연합의 실현이라는 공동체적 해결책과는 상반되고,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가차원의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독자적인 위기탈출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통화위기로 크게 흔들린 EEC는 경제통화연합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그 밖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관심을 쏟을 수 없었다.

경제통화동맹(EMU : Economic and Monetary Union)은 EC발전을모색하는 사람들의 핵심 사항이었다. 통화동맹은 진정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또한,정치적으로도 통화동맹은 재정정책, 조세의 평준화, 단일경제, 그리고 나아가 단일화폐 등에 대한 초국가적 결정을 가능하게 해줄것이었다. 요컨대 이들은 정치통합을 이루는데 필요한 선결 요건들이어서 통화동맹은 실로 많은 장점을 가졌다. 그러나 경제동맹과통화동맹 중 어느 것을 첫 단계로 하느냐로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1970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국제환경도이 EMU에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베르너보고서에도 불구하고 경제동맹과 통화동맹 중 어느 것이 EMU를 향한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된 채 남게 되었다.

통화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snake'라고 불리우는소폭변동환율제가 도입되었으나, 이것은 공동체의 운용과 정책에서 결코 효과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snake가 실행되는시점에서 이탈하였고, 프랑스는 snake에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하였다. sanke는 서독을 위시한 어느 정도 통화안정을 이룰수 있는 국가들로만 유지되었다. 통화동맹의 문제는 각국간 경제정책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새로운변동환율제도에 대한 불신이 증대되었다. 급격한 환율변동의 위험때문이었다. 변동환율제도의 실시와 함께 통화를 운용하는 기관을설립하는 것이 EC에게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새로 집행위원회 의장이 된 젠킨스에 의해유럽통화제도(EMS)에 대한 의견이 최초로 제시되었다. EMS는 베르너보고서에서 주창된 완전한 형태의 통화동맹은 아니었으며,슈미트, 젠킨스, 프랑스의 데스텡등은 이 제도를 정치연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EMS는통화동맹으로 순조롭게 발전했다. EMS는 브레턴우즈체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EC를 강화시키는 최초이며 가장 중요한 수단이되었다.

EMS는 각 회원국 통화와 연계된 '환율조정장치(ERM : exchange ratemechanism)'를 제공하였고, 상대국 통화에 대한 자국 통화의 시세변동율 허용 한계를 설정하였다. ERM은 각국 화폐와병행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유럽통화단위(ECU : European Currency Union)'의 설립을 통해 보완되었다.EMU는 1970년대 수준에 비하여 환율 불안정성을 현저히 감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ECU는 EC 역내에서 계산 기능을 수행하는것뿐만 아니라, 역외에서 금융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EMS가 공동체를 총괄할 수 있는 영역이없었다는 점이다. EMS의 설립은 통합으로 가는 여정에서 중요했다. 이것은 각 회원국에 협력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렇지만,EMS는 회원국들의 정치적 타협과 경제적 필요로 생겨난 것이었다. 완전한 형태의 통화동맹이 되기 위해서는 EC가 공동통화정책을수립하는 일뿐만 아니라, 단일화폐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일까지 고려해야 하나, 이것의 실현을 국가주권과 직접 충돌하는 일이었다.EMS는 국가 주권에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오히려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고 볼 수도있다. EC는 1989년에 가서야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게 되었고, 유럽이사회는 이 문제와 관련한 들로르위원회의 보고서를수용하였다. 이 사실은 EMS의 한계를 넘어선 결정적인 조치를 의미했다.

5.2 정치통합의 추구

1970년대에 들어 EC의 활동은 경직되었다. 세계 경제는 전반적으로 불경기였으며, EC의 각 회원국은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에 따라장기적인 경제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혀 EC는 정치적 협력을 더욱 긴밀히 하게 되었다. EC의 확대로 의사결정이어려워지고 어두운 경제 여건을 고려해 볼 때 특히 EPC에서와 같은 그들의 단결력은 매우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EMS제도 자체는 정치적 대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EMS는 정치협력의 궁극적 지향점이었고, 따라서 EC는 정치적 통합의개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제적 차원에서 EC는 꾸준히 위상을 신장시켜 나갔다. 즉, EC는 다른 국가들과 공식적 관계를체결하고, EPC를 통해서 중요한 활동을 수행하며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 실례로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Conferences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에 EC는 '유럽공동체의 이름'으로 서명하였던 것이다. EC 내적으로는 제도, 경제·통화동맹, 정치통합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대외면에서 통합체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물론 회원국들은 자국의 독자 외교정책 방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통의 입장을 항상 도출해 낼 수는없었다 [각주:40]. 그럼에도, 서유럽 국가들은 더 많은 공통의 입장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고, 한 번 이루어 낸 것은 계속 유지하려 하였다.

EPC가 협력 수준을 상승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EPC는 EC 구조 밖에서 정부간자발적 운영기구로 남았다. 결국 그것은 EC 회원국들이 국가 주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EPC와 다른 외교정책 방향을 조정해야 할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EPC활동과 관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회원국들은지속적인 연계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각국 간의 연계를 발전시키면서 각 회원국은 자연스럽게 자국의 외교정책을위해 더 많이 공헌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치연합을 위한 두 종류의 보고서가 나왔다. 그것은 '틴더만보고서'와 '3인 현인위원회'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두 보고서 모두 실현되지 못한 채 사문화되었다. EC 발전을 위한 그 다음발의는 집행위원회와 유럽이사회 밖에서 나왔다. EC 발전을 위한 어떤 긍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EC는 일련의 조치를 필요로 하는 상호 관련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각주:41]. 이러한 문제들의 이면에는 EC 자체의 구조적문제가 깔려 있었다[각주:42]. 효과적인 정책 결정을 위한 제도적인 개혁에는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떻게하느냐가 문제였다.

다시 한번 겐셔-콜롬버 계획이 제안되었다. 유럽이사회가 어떤 조치 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한시도였다. 대체적으로 이 제안은 유럽이사회를 유럽의회의 통제를 받는 조직으로 바꾸고 EC 기관과 로마조약 틀 밖에서 조직된유럽이사회의 책임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 점때문에 겐셔-콜롬보 계획은 그야말로 유야무야되었다. 또 다시 유럽연합이라는수사적 이상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 보지도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로도 유럽의회의 지지를 받은 스피넬리가 새로운 시도를벌였으나, 이것 역시 사장되고 말았다.

1984년 6월, 퐁텐블로 정상회담에서 유럽이사회는 정치연합을 주제로다루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연합을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하였고,10개국은 두개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합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EC의 장래와 설립조약의 개정을 논의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정부간회의를 소집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밀라노회담에서 로마조약의 개정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고, 두 개의 실무 그룹이 조약개정과 EPC문제를 다루었다. 1986년 12월, 드디어 단일유럽의정서(SEA)가 체결되었고, SEA는 1987년 1월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SEA는 공동시장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새로운정책 결정 형식을 채택하고, EC 내의 입법과정, 외교정책과 방위 그리고 안보 문제를 포함하기 위한 EC의 영역 확대 등도다루고 있었다. SEA는 1992년까지 완전한 단일 공동시장 창설을 의무화했다. 궁극적으로 조세와 법률의 국가적 체계,정책분야에서 과도한 국가기준들과 규제들 그리고 사회복지와 안보 체계라는 전체 영역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었다. 또한EC권력 구조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게 되는 제도 개혁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떤 정책이 채택되면, 실행 과정에서는 오직 가중 다수결표결만이 필요한 것으로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EC내의 정책 결정 과정을 촉진시킬 것이었다. SEA는 마지막에서EPC의 조직화를 결정했다. 간단히 말해, SEA는 EC가 흔히 봉착하기 쉬웠던 난관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려는 포괄적인시도였다. SEA의 핵심목표는 상품·서비스·자금과 인력의 공동체 내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국경없는 공간의 실현이라고 할것이다. 로마조약으로 형성된 공동시장이 SEA와 공동체 내부의 물리적 국경 제거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SEA는 EC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EP의 요구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유럽연합 계획을 진전시키지도 못했다. 통합단일시장의실현과정에서 드러난 맣은 결점으로 인해 SEA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EA는 1980년대에유럽통합의 진전을 위해 중심기관이 된 유럽이사회가 채택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SEA와EC를 위해 쟈크 들로르는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주요 반대자는 영국이었다. 그러나 대처의 영국은드골의 프랑스가 아니었다. 이미 통합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SEA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이 모색되었고, 1991년EMU와 정치협력에 관한 새로운 협정이 마스트리히트 유럽이사회에서 최종적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파리조약(ECSC창설조약), 로마조약, 그리고 SEA를 하나로 묶어 개정·보완하는 단일조약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유럽연합에 관한 조약 Treaty on European Union'인 마스트리히트조약이다.

6. 1992년 - 마스트리히트조약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

1957년 로마조약이 체결된 지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유럽공동체는 정치와 통화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겨우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동구 공산권의 급격한 와해와 갑작스런 독일통일은 유럽통합의 과정에 심한 동요를 불러왔고, 그와 동시에 유럽회의주의도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유럽공동체는 안팎의 문제에 대처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야 했고, 돌파구를 위한 적극적인 자세의 결과가1991년 말에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다[각주:43]. 이 조약의 핵심은 경제통화연합EMU과 정치연합(EPU : EuropeanPolitical Union) 창설이다.

들로르와 그의 참모들이 1990년 역내시장 창출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유럽연합의 형성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로 결정을 한 것은 바로 동유럽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들로르는 1990년 1월에집행위원회가 진정한 행정부가 되기 위해서 더 강력한 정책결정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집행위원회는 미래 연방의민주적인 기구들, 특히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EP에 대해 책임을 지며, 그것과 세력균형을이루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방주의의 실현에 대한 강력한 의사표시였다. 물론 이것은 국가간 협력체를 원하는 이들의 강력한 반대에직면했다. 초국가주의와 정부 간 협력주의의 대립은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1992년에 형성되는 유럽공동시장의 의미는유럽통화에 대한 상징성 외에도 각 국가의 주권을 어느 정도 축소시키게 될 것이었다.

EC는 이제 분명히 유럽세계의 중심이다. 연방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인 대처도 영국은 여전히 EC의 동등한 그리고 충실한 회원임을 강조했다. EC는이제 유럽인의 생활의 한 형태로, 많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여러 삶의 형태들 중 하나로 되었다. 아직 방향이나목적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그리지 못하고 있으나, EU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도 조만간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분명해졌다.

EU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 즉 EFTA의 잔류 국가들과 동유럽 문제는 EC로서는 골치 아픈일이었다. 특히 동유럽은 EC가 EFTA로 인해 직면했던 문제보다 더 큰 규모의 딜레마였다. 1989년의 동유럽에서 일어난사건들은 EC의 확장을 요구하는 국가들과 기존 회원국간에 좀더 긴밀한 연합을 추구하는 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논쟁을 유발시켰다. 현재 EU는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리아를 새로 포함하여 16개국으로 늘어났으며, 그 밖에 터키와 말타, 키프로스도 가입을 신청했다.

특히 문제되고 있는 것은 동유럽이다. 지금도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밀려들어가는 난민으로 서유럽 각국 정부는골머리를 앓고 있는 처지인데, 그들이 정식으로 EU에 가입하게 되면, 더욱 많은 난민들이 일자리와 더 나은 생활을 찾기 위해이동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유럽국가들이 그들이 희망하는 바대로 EU가입을 통해서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뿌리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EU가 현실적인 이유만을 내세워 이들의 가입 희망을 뿌리치지는 못할것이다. EC가 그리스, 스페인, 포루투칼을 가입시킨 결정적인 동인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유럽연합(EuropeanUnion)을 성립시키기 위해 1992년 2월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비준 과정에서 많은 논란을불러일으켰다. 경제불황과 실업증가, 그에 따른 사회적 불안, 여론의 정치권력에 대한 식상 및 유럽통합에 대한 대여론 홍부부족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을 둘러싼 찬반토론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인식으로, 일반 유럽인들은 공동체를 자기와는 거리가 멀고, 비민주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관료주의 체제로 인식하였다. 덴마크,영국,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민족적 동질성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하기까지 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헌법에위배되지 않는가에 대한 심판부터 받아야 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비준에 성공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공동체 국가들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게 되었다. 1993년 1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 유럽공동체는 이제 유럽연합으로발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연합은 유럽 각국과 지역의 역사적 다양성을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92년 12월부터는 유럽공동시장이 성립되어, 자본과 화폐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역내시장은 경제통화동맹으로 발전을 가속화시키고있으며, 필연적으로 주권의 일부를 회원국들로 하여금 공동체에 이양하도록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통합단계와는 차원이다르다. 주권의 양도는 공동체가 정치연합으로 이어질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있으며, 주권의 양도가 이루어질 때 정치 공동체가성립되기 때문이다.

정치연합의 성공이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1993년 11월 1일부터 유럽연합이 본격적인가동에 들어갔지만, 처음 로마조약의 체결로 EEC가 탄생했을 때 불러일으켰던 커다란 희망과 비교해볼때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보이고 있다. 공동 외교 안보 정책 ECU 등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회의주의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두번째로 마스트리히트조약 자체의 모호성과 상반성으로 그 자체 각 국가 간 타협의산물이다. 로마조약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때보다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도 차후 논쟁의 여지가 많다고 하겠다. 세번째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통합된 유럽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통합되어 있지 않다.유고슬라비아의 민족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네번째로 경제침체에 따른 실업의 증가와 사회 불안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각주: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유럽 건설에 새로운 방향과 활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동구 공산권의붕괴와 독일통일로 유발된 새로운 국제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유럽 12개국의 의지도 이 조약에 분명히 나타나있다. 유럽통합의현주소는 많은 희망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테랑은 1993년 10월 25일TV대담에서 유럽통합은 "의지의 문제"라고 전재하면서 현재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극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유럽통합의 빠른 실현을 강조했다. 아직 유럽통합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 미래의 청사진은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으며, 더군다나 현재 진행중인 역사이다. 그리고 유럽통합의 장래에 이처럼 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우리의 주목을 필요로 한다고여겨진다.[각주:45]

III 독일의 통일과 유럽통합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이 통일되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소련역시 해체되고,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유럽통합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당연하며,냉전의 소멸로 유럽공동체의 대외 안보 정책구조에 변화가 따라야 함은 물론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한국도 통일될 수 있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리고, 통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독일의 예에서 어떤 교훈을 창출하고자 애썼고, 독일통일에 대해서 많은 연구서와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독일통일의 또 다른 측면을간과하고 있으며, 그 간과된 부분은 독일과 한국의 매우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다.

독일통일의 요소로 흔히 소련의 붕괴를 든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독일이 통일될 때, 이웃 국가들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인정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로서 역할은 유럽공동체가 담당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별로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유럽통합은 진정한 의미의 유럽통합이 아니라, 냉전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맞물린서유럽만의 통합이었다. 즉, 독일 문제와 냉전구조가 서유럽통합의 추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통일되고,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기존의 서유럽통합은 그 의미를 잃었고, 이제 실질적인 유럽통합을 이룩해 낼 수 있을것인지에 문제의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보아 온 바대로, 독일은 유럽 통합에 매우 적극성을 띄고 임했으며, 경제 면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이것은 초대 수상 아데나우워(K. Adenauer)의 서방 통합 정책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의 서방통합 정책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보완되었다. 먼저 독일의 분단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개괄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7. 독일의 분단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대 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점령'은 구체적인 점령기간을 정하지도 않은 상태였고,분할된 각 점령지역이 장차 별개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전후 독일정책은 전쟁중에 수립되었다. 1944년말, "독일통제기구협정"이 베를린에 설치되었고, 이 기구의 임무는 全독일에서통일된 점령군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각 군사정부의 사령관은 자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해당 구역내에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전승국의 독일정책에 관한 거부권이 도입된 셈인데, 全독일에서 사태 발전이 어느일방 점령군의 목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점령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 이미 독일분단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던것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그의 저서 {독일현대사}에서 연합국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계기는 배상문제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매우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소련의 동유럽으로 진출 야욕과 1919년의 실수[각주:46]를 되풀이하지 않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간에 세력다툼이 주요한 요인이라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미국이 소련의 배상요구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배상을 통해 소련의 경제력을 미국과 동등한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확실하게 중·동부 유럽에 뻗으려고 했다. 미국으로선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힐그루버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배상문제는 이러한 대립속에서 배경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이념적인 대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 통일체로 간주한다."라는 것에 동의했으며, 독일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 이념의 성공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그들의 서로 다른생각들이다. 미국 등 서방측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및 서방식 민주주의 체제를 생각했던 것이며, 소련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기도 전인 1945년 4월 30일에 발터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부터 독일로 파견하여 소련식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소련은 소련으로부터 미국과 영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병합, 인민민주주의 지대, 완충지대를 구사했고, 완충지대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부 독일을 인민민주주의, 즉 소련식체제로 개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 아래 소련은 1946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강제로 만들어 냈고, 미국군사정부 사령관 클레이는 1946년 5월 3일 배상물품 인도 거부로 맞대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6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파리 외상 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은 "소련 지역의 예를 따른 민주화"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에 대해 "미국은유럽으로부터 힘의 정치적 군사적 퇴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덧붙여서 미국지역에서부터 연방제 독일을 수립하겠다고밝혔다.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공격 외교방향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마샬 플랜을 수용하느냐 하는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은 이제 분명하게 동서진영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마샬 플랜에 독일의 서방 3국 점령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독일을 서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소련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련은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1947년 7월 14일에 소련점령지구에만 해당되는 "독일 경제 위원회"를 신설하였고, 미국은 서부지역만 재건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全독일" 표방은 미국에게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았으며, 특정조건 하에서만 소련과 일치하였다.

1947년 11월 25일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 런던 외무장관 회담은 이제 냉전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먀샬과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슐레지엔의 독일 귀속을 주장했다. 이것은 소련은 미국이 그들의 지배권을 소련점령지역인 동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미국의 독일정책은 마샬의 한 마디에 급선회하게 된다. 미국은 '서방식' 해결을 위해 서방 점령 지역의 독일인의 지지를 유도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사실 미국이 소련보다 더 독일에 파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따르지 않고 다수가 서방측에 기울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첫째는 정통적인 독일 외교정책인 '줄다리기'정책을 계승한 소국으로 축소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동방화된 독일, 그리고마지막으로 서방으로 통합된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이 세 집단의 공통점은 하나의 독일, 즉, 이른바 '全독일'을지향했으며, 어느 누구도 독일의 분단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중립국독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서방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소련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동방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독일내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은 그것이 독일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이었으므로중요하다. 반면, 서방화를 지향하는 그룹은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집단이나, 전후 독일의 재건을 담당한 이들은 바로 이들 서방화 지향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Konrad Adeunauer가 그 중 대표 인물이다. 특히 이들은 서방 3개국 연합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서방 3개국의 지원은 매우 중요한요소이다. 논쟁 역시 주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서방화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논쟁은 1949년 1,2차 연방 하원 선거에서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제 독일은 분명하게 서유럽통합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것은 미국·영국·프랑스에게는매우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이제 서방 3개국, 특히 미국은 그들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 런던 외무장관 회담의 결렬 이후, 미국은 독자적인 서방국가 계획 실현에 소련과 어떠한 종류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포기하였다.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대소련 봉쇄를 시도하게 되며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전진기지로서 서독의 부흥과 서유럽통합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1948년 3월에 브뤼셀 조약이 체결되어 서유럽 국가들의 공동 방위를 꾀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힐그루버는 소련을 대상으로 한 동맹체제로 평가하고 있으나, 실상은 독일에 대한 방어체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서유럽이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 대항하여 제대로 방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부활이 필요했다. 부언하자면,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이서유럽 방위에 필수적이었다. 이에 미국은 본격적으로 독일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서부 독일 지역만이라도 다시부흥시켜 서독을 서유럽방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과 같은 해결책을 시도했지만,프랑스로서는 미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동부 독일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지자 미국과 영국,프랑스는 서방 3국의 점령지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데 합의하였다. 1949년 9월 21일, 정식으로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출범한다. 동독은 조금 뒤인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멍에를쓴 채, 분단국가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8.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서독의 초대 수상은 콘라드아데나워라는 73세의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독일 부흥에 대한 신념은 누구못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 독일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국토는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주권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각주:47]. 국민들은 자신감을 잃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동부 독일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같은 상황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수상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 국가들과 관계개선이 시급한 문제였다. 특히 프랑스와 화해가 독일의 재건에 절대 필요했다. 프랑스와 화해, 이웃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 아데나워는 서유럽통합에 적극 나서게 된다.

아데나우어가 서유럽통합에 적극 자세를 보인 이유는명확하다. 독일이 나치 범죄의 멍에를 벗고 이웃 국가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불식시키면서 번영하기 위해서, 그리고 군사 피점령국의 상태에서 국제 사회에서 동등한 주권국가로 조속한 회복은 서유럽에 굳건하게 독일이 통합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으로써만이 독일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즉, 유럽통합을 통해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독일 통일은 단지 비운의 역사가 반복될 따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독일의 극단 민족주의 전통을 유럽 이념으로 대체하고, 그 위에서 독일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서독에 주어지지 않고 유보된 주권은 회복될 민족국가를 위해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서유럽에 이관되는 것이었다[각주:48].

아데나워는 독일의 유럽으로 귀속하는데 우선 서독을 견고하게 유럽에 통합시킬 것을 상정했다. 무엇보다 서방 세계의 견고한 단결과 발전을 통해 힘을 모으고 그 힘을 바탕으로 동유럽 세계를 움직여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을 통일한다는 견해였다. 서유럽이 견고하게 단결하고 경제 번영을 누림으로써 소련으로 하여금 서방의 힘에 굴복하게 하고, 서독은 번영과 분배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동독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통일은 유럽 안보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했다. 서유럽 민주주의의 질서 속에서 집단안보체제를 이룩하고, 서독과 서유럽 자체 내의 개혁으로 눈부신 경제 성장과 평등한 분배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각주:49].

사실, 서독은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의 세계전략 가운데에서 하나의 기능을 갖기 위해 출발하였다. 더구나 서독은 궁극적으로서방지향적인 전독일을 달성할 핵심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제 4점령세력인 소련의 정책과 날카롭게 반대되는 입장에서 건국되었으며,세계 열강 사이에서 이제 "냉전"이라고 부르는 대립의 초점 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각주:50]. 아데나워에게는 독일의 분단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부독일과 서유럽이 소련의 영향력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서유럽에 서독을통합시키고, 미국과 공동으로 잠재력을 완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데나워의 정책은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과 단절하고, 이 지역과 소련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유럽통합을 이루고 독일통일을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극히 호전적인 정책으로 비판받았으며,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소련이 항복하리라고는 그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데나워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거나 교활한 분단고착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각주:51]

9.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BilyBrandt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분단의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베를린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던1961년, 그는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사건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는 이때의 경험에서 강대국들에 의존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굳히게 된 듯 하다[각주:52]. Brandt는 동서간의 무모한 대결은 독일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963년 Tutzing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Bohn정부는 경주에 승리하고자 하며, 동쪽에서 제시하는모든 제안에 대해 그 제안이 단지 동쪽에서부터 왔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빠르고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독일문제는 세계정치적 측면, 유럽적 측면, 안보문제, 인간적·국가적 측면 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관심을 가지고있는 인간적 삶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우리끼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독일 내에서 이에 대해서로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 소련과 함께만이 독일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그들에 반대하고 대립적 입장을 취해서는해결방안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권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동·서간의 새로운 관계가 요구되며, 독일과소련과 관계 역시 요구되며 정립되어야 함을 우리 모두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각주:53]
그의 또 다른 말을들어보자 :
작은 발걸음의 정치는 인권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 확보에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보다는 작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직성과 평화를 위협하는 긴장에 대한 완화는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후를 조성해 준다.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지않고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각주:54]
즉, 인간문제의 해결과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긴장완화가 필요하며, 그것은 아데나워의 일방 서방통합정책이 아닌 서방통합정책과 병행하여 동방과 접근을 통해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각주:55].

Brandt의 동방정책이 단순한 외교정책이 아님을 이 두 가지 언급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고,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긴장완화가 필요하며, 그것은 소련 및 동구권과 교류와 대화 속에서 이룩될 수있다는 그의 분명한 신념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한국의 북방 정책과는 배경에 깔린 이념부터 근본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보다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남한의 북방정책은 아무런 이념적 배경없이, 그럴듯한 겉모습만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각주:56].

각설하고, Brandt에 따르면 긴장완화는 동·서 양진영의 세력균형을 전제로 한다. 서방세계가 튼튼한 방위능력을 보유할 때 동·서간에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고, 거꾸로 동·서간의 긴장완화가 이뤄질 때 서방의 안보가 보장된다는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바로 아데나우어의 정책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아데나우어의 서방 통합 정책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서 양진영의 세력 균형이라는 전제 위에서 국제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그 세력 균형은 서독의 NATO가입과 동독의 바르샤바조약기구(WTO) 가입으로 가능했던 바,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결국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방정책은 서방통합이라는 기반 위에서동독 및 동유럽 국가들과 접근을 통한 통일정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란트는 세력균형 원리에 기반한 전쟁 방지에 만족한것이 아니라, 세력 균형 원리에 기반한 적극적인 평화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다. 서독의 서방으로 통합과 동방 정책은 상호 보완하는 성격의 정책이었다. 이제 양 독일은 각각 진영에서 충실한 구성원이 됨과 동시에 이러한 기반 위에서 긴장 완화 또는 화해 정책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긴장 완화 정책을 통해 유럽 분단이 극복되고, 독일 통일이 달성될 수 있다는논리였다[각주:57]. 이러한 긴장완화는 유럽의 운명을 유럽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여지를 한정적이나마 부여해주고,아울러 이것은 독일문제에서 독일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브란트는 1민족 2국가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대표적인 예가 UN가입이다. 브란트의 정책이 동·서독 분단의 현실(statusquo)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분단의 극복을 위한 대장정이었다. 영구 분단을 상징하는 듯한 UN가입 이후 서독은 이후장기적 통일정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좀더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임할 수 있는 국제·국내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소련의 이해가 필수였다[각주:58]. 그리고 소련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양국간에 공통 분모를 찾아야 했다. 이 공동의 이해 관계는 새로운 유럽평화질서의 구조에 관한 것이었고, 결국 1989년에 완성된다.

10. 1989년,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1989년에 들어와 동구사회주의권은 엄청난 변혁의 물결에 휩싸였다. 동구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으며, EC는 이제서유럽통합이 아니라 범유럽통합의 중심이 되었다.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동구국가들은 EC에 가입을 원했다. EC가 이들을 거부할수는 없을 것이나,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상 어려운 면이 있었다[각주:59]. 그러나 동독은 달랐다. 이미 동독은 서독과 연결을 통해 EC내에서 특혜를 받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EC라는 테두리 안에서 독일 통일의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그것은 서독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독일의 과거사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유럽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로서는 독일 통일이 야기할 이웃 국가들의 두려움과 불신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독일이 통일되어도 NATO와 EC에 귀속될 것을 주장하였다. 독일은 독일 통일의 유럽 차원을 강조하였다. 통일은 단순한 동서독의 통합이 아니라, 서독이 이미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는 서방체계로 동독을 편입시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은 유럽통합을 심화시키기 위해 가시 노력을 기울였다. 역내 공동 시장의 창설과, 경제 통화 동맹의 실현에 독일은 앞장섰으며, 통일 이후에도 공동체에 대한 재정 기여를 줄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독일이 통일되면 유럽 통합이 가속화될 수있다는 기대감이 일 정도로 독일통일과정에서 많은 고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고, 통합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1년 전인 1989년 12월 8일에서 9일까지 개최된 유럽이사회는 다음과 같은 공식 선언했다:

우리는 유럽에서 평화의상태가 정착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가운데 독일 국민은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통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민주적인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되어야 하고, 기존의 모든 협정과 조약들을 이행해야 하고 헬싱키 최종 선언문에 표현되어 있는 모든사항이 동서간의 화해라는 취지에서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통일은 유럽통합과 부합되어야 한다.....[각주:60]

결국 당시 EC집행위원장 자크 들로르가 동독이 독립국가로서 EC에 가입한 후 독일통일을 달성하는 방안과, 동서독이 통일된 후EC에 가입하는 두 가지 안을 제안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독일의 과거사와 통일독일의 강력해질 힘에 대한이웃 국가들의 두려움과 우려를 표명한 것이었다. 독일은 이러한 불신감을 해소하고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기울였으며, 그 결과 유럽통합은 가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통일도 순조롭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통합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는 경제적 지역공동체이다. 그러나, 그 출발은 단순한 경제적 지역공동체가 아니었다. 공동시장이라는 매력적인 겉모습외에 유럽통합은 다시는 독일이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통제하는 목적과, 소련에 대항한 서유럽국가들의 통합이라는 이중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기 때문에 독일이 했던 일을 우리가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되었다. 독일은 침략자로서, 가해자로서 죄과를 참회하며, 유럽이라는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확고하게 책임지겠다는 것을분명히 함으로써 그들은 이웃 국가들의 불신감을 없애고,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은 결코 우리의통일을 바라지 않을 뿐더러 현상유지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통일을 위해 움직일까닭이 없다. 단지 그들은 현상유지만을 바랄 뿐이다. 일본은 북한의 핵문제가 걸려 있는 까닭에 북한과 협상을 시도하겠지만, 단지그것뿐이다. 핵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능동적인 대북외교를 펼칠 필요성을 일본은 가지고 있지 않다.

흔히 서독의 동방정책이 통일의 밑바탕을 마련했다고 한국에서는 얘기되어진다. 그러나, 결코 Bily Brandt의 Ostpolitik가 통일의 밑바탕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이라는 대목표 안에서 독일의 외교정책이 수행되었기 때문에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성공할 수있었고, 독일통일도 가능했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동독인을 흡수할 충분한 여력을 갖추었으며, 그것은 사회민주화라는 말로 요약할수 있다. 독일통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시작한 북방정책은 단지 Bily Brandt의 동방정책을 겉모습만 따라했을 뿐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 독일은 유럽공동체에 헌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또한 그러한 면을강조하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독일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유럽 이웃 국가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었던 것에는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에 기반한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른 한국에서 과연 독일식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그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하고 싶다.

콜수상과 겐셔 외무장관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독일의 유럽을 건설하는 것이아니라, 유럽의 독일을 건설하려 한다.

Wir wollen nicht ein deutsche Europa, sondern eineuropaeisches Deutschland schaffen."
[각주:61]
일본은 아시아의 일본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아시아를 만들려고 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과 공동체를 구성하는 날에는 공동의 번영이 아닌 일본이나 중국을 위한 번영의길을 제공할 따름이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독일은 통일 이후에 예상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고, 그것때문에, 신나치들이 설치고 있기는 하나, 다수 독일인들은 유럽통합의 구조 속에서만이 독일이 번영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독일인들은 유럽의 발전을 위해 그들이 져야 할 부담은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신나치의 존재는 거꾸로 유럽통합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의 통합에 대한 정열이 무르익었을 때가 바로 나치에 저항하여 투쟁할 때였던 것이다.

한국은 독일식의 통일을 추구할 수 없다. 우리는 독일통일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지도 않지만, 정확하게 안다고 하여도대외정책적 측면에서 그들을 따라 할 수 없다. 그럴 만한 여건이 동북아시아에는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남한은아데나워의 '힘의 정책'과 브란트의 유화정책(동방정책)을 모방하고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대화당사자를 국가가 아닌 교전상태의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독일식으로 성공할 것인가. 물론 북한도 결코 제 2의동독이 되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식 통일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필자는회의적이다.

IV 맺음말

지금까지 유럽통합의 역사에 대해 개괄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관심사가될 수 밖에 없는 독일 통일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유럽통합이라고 하면, 경제적 문제, 즉, 공동시장의 창출을 먼저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애초 유럽통합운동의 첫 출발점이었기 때문이고, 그 후에도 주되게 유럽통합 운동을 이끌어 왔던 동력은경제였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동력인이 유럽통합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다.

지금 세계는 초국가주의에 입각한지역주의가 실현되면서 지역별로 세계의 국제화가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즉,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세계 질서가 이제 더 이상은 지탱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힘의 추동력은 자본주의였다. 현대 자본주의와 국가 단위의 세계 체제는 더 이상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아예 장애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해서만이 성장한다.경쟁력이 있는 지역의 경제와 문화가 그렇지 못한 지역을 장악한다. 이 통합의 국제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발생하는 현상이 같은 문화권의 또는 지역권의 국가들과 협력 내지는 통합인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발달 이후 인류의 문제는 국가가 해결해 왔으나,자본주의 자체가 국가를 불필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따라서 산업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한 사회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국가라는 단위에서 해결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 통합 운동이 결코 경제 목적을 추구하며 추진되어 온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존 국가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기구를 지역 공동체에서 찾게 되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러한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지역 내의 국가 간 분쟁을 지양하고, 지역 내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처음 유럽 통합 운동이 일어났던 것도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단편 이익을 바라며 유럽인들이 통합운동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에서 유럽인들은 더 이상 민족국가 체제가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실질적인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유럽인들은 민족국가 체제를 해체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전쟁의 원인이 유럽이 각 주권국가별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는데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각주:62].

이러한 측면에서 유럽 통합운동의 첫 출발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통합운동의 출발은 서유럽 통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련의 침략 위협에 대항하여 유럽이 단결해야 했던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유럽 통합은 처음에는 냉전과 유럽의 분단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주로 이 정치 통합에 초점을 맞추어 개괄하였다.

합은 다른 지역의 통합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NAFTA, ASEAN, APEC 등이 생겼다. 지역주의를 동반하는 세계화의 진행인셈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초국가주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역사를 분명히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주의를 단위로 하는 세계화의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가 없는 사람들은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 지 모른다. 우리 스스로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어려운 점은 지역주의에 의한 통합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아직 분단국가인 우리 입장에서,유럽통합과 독일통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독일은 자신들의 민족문제를 지역통합이라는 범주 안에서 해결하였다. 이러한 독일 통일의 경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회가 과연 무엇인지는 지금 동북아시아의 상황에서는 명확하지 않다. 동북 아시아에서는 지금 지역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포럼(forum)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주권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동북 아시아 상황 속에서 독일이 추구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란 점이다.

※ 참고문헌

  • 장 홍, {유럽통합의 역사와 현실}, 고려원, 1994.
  • 손선홍, {새롭게 쓴 독일 현대사}, 소나무, 1994.
  • Hillgruber, Andreas, Deutsche Geschichte 1945-86 : Die "deutsche Frage" in der Weltpolitik, 손상하 譯, {독일현대사 1945-1986}, 까치, 1991.
  • Urwin, Derek W., The Community of Europe : A History of European Integration since 1945, 노명환譯, {유럽통합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4.
  • Brandt, Bily, Erinnerungen, 정경섭 譯, {빌리 브란트 - 동방정책과 독일의 재통합}, 도서출판 하늘과 땅, 1990.
  • P. Armstrong, A. Glyn, J. Harrison 공저, Capitalism since 1945, 김수행 譯, {1945년이후의 자본주의} 동아출판사, 1993.
  •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예, 김영식·이봉철 譯, {유럽외교사 (하)}, 까치, 1982.
  • 노명환, '유럽통합, 독일의 분단과 통일', {서유럽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유럽연구소, (창간호, 1995년 2월)

  1. 샤를르마뉴의 프랑크 제국에서부터 가까이는 히틀러까지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경우를 진정한 '유럽 통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유럽 연방 공화국' 창설을 촉구한 빅토르 위고와, 생시몽, 공동군의 창설과 유럽 의회 설립을 제창한 제러미 벤썸(Jeremy Bentham), {영구평화론}을 지은 칸트와 생-피에르 신부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르몽드>지의 주간 앙드레 폰텐느의 지적처럼 이후 진정한 정치 실체로서 유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장홍, {유럽통합의 역사와 현실} (고려원,1994. 11.), p.26 [본문으로]
  4. 나치라고 하는 공동의 적 앞에서 그들은 뭉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점령 치하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공동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지만, 그들의 유럽 통합에 대한 기본이념은 동일했다. 이런 움직임은 1941년 7월의 베네덴토 선언과 1944년 7월 제네바에서 발표된 <유럽 레지스탕스 선언>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선 조국 해방이라는 당면 과제가있었고, 또한 공산계와 비공산계 사이에 통합이라는 개념에 대한 상이성으로 인해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레지스탕스가 새로운 유럽 통일을 위한 씨를 뿌리기는 했으나, 싹이 트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장홍, ibid., p.44. [본문으로]
  5. 1920년대와 30년대에도 유럽 통합 운동이 있었다. 1930년 프랑스 외무성의 <브리앙 각서>이 그 사례이다. 브리앙은 미국의 대공황을 염두에 두고 유럽의 경제 통합을 위한 정치 연합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된 유럽 통합 운동과 방법론에서 대조된다. 브리앙 각서에서 유럽 통합의 장기 목표는 <유럽 공동체 전 지역에 걸쳐 복지 수준의 최고화>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시장의 형성이다. 이 브리앙 각서에서 공동 시장, 공동체 등 차후 유럽통합에서 핵심 용어들이 이미 사용되었다.그러나, 이 브리앙 각서는 결국 빛을 보지못했다. 장홍, ibid., p.42. 브리앙 외에도 쿠덴호프 칼레르기 백작을 비롯한 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으로 몇몇 정치인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실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간에 벨룩스 경제 동맹이 체결되기도했으나, 의미있는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까지 유럽통합은 어떤 형태, 어떤 형식으로도 심각한 토론 주제가 되지 못했다. 어윈 저, 노명환 편역, {유럽통합사} p.7-11. [본문으로]
  6. 알브레히트-까리예, 김영식, 이봉철 역 {유럽외교사 (下)}, (서울, 1982), p.563. [본문으로]
  7. 1947년 6월, 미국 국무장관 마샬은 유럽에 경제 면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경제원조를 단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소련을 포함한 동구 공산 국가들도 이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이 이 제안을 거부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고, 사실 마샬플랜은 소련에 대항하는 서유럽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결국 냉전을 가속화시켰고, 유럽에서 동서 간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본문으로]
  8. 트루먼 대통령의 한 비서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마셜계획은 트로먼 독트린의 실행 형태이다." 암스트롱 외 2인, CAPITALISM SINCE 1945,김수행역,{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1993,서울), p.115. [본문으로]
  9. 영국의 이러한 태도는 향후 20여년 간 계속되었고, 유럽 연합이 결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10. 독일의 입장에 관해서는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3] 독일의 통일과 유럽연합'에서 후술하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11. 슈망은 선언에서 "유럽은 틀림없이 연방이라는 기초 위에 조직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영국이 이러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임은 명확했다. [본문으로]
  12. 슈 망플랜의 이면에는 또한 새로운 서독을 통제하려는 프랑스의 정치적 구상이 숨겨져 있었다. 슈망플랜은 독일을 견제하고자하는 이웃 국가들의 의도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안이었으며, 서독의 입장에서도 서유럽통합을 통한 독일문제 해결이라는 아데나우어의의도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본문으로]
  13. 이 6개국은 유럽통합을 지지하였으며, 유럽은 대륙의 6개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국가라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분열을 겪게 되었다. [본문으로]
  14.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영국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이 하면 우리도 한다"라는 말에서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15. 이 과정에서 미국이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한 가지 예로 프랑스의 서독 중공업의 기업 집중 배제 요구를 서독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한 점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입장은 서독을 서둘러 부강하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6월의 한국전쟁 또한 협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16. 빠리 조약의 모호성은 거꾸로 ECSC에 대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요소였다. [본문으로]
  17. 이 문제는 ECSC의 공식 언어를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논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서로 자국의 언어를 쓰기를 원했고, 결국 4개의 언어가 같이 사용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본문으로]
  18. EEC의 탄생까지 기간을 얘기함. [본문으로]
  19. 1963년 독불 우호조약 체결로 이러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본문으로]
  20. 1954년 베트남의 Dien Vien Pu 전투의 패배가 EDC계획에 반대하는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본문으로]
  21. 이 과정에서 서독은 재무장을 하게 된다. 프랑스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프랑스 자신으로 인해 결국 이룩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본문으로]
  22. 의결에서 만장일치제의 도입은 드골의 강력한 주장이다. 다중가수결 방식의 투표제는 드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공동체를 초국가기구로 이끌고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23. 장홍, op.cit., p.139. [본문으로]
  24. 장 모네는 이러한 드골의 "우월과 지배정신"을 6월 26일 성명을 통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장홍, ibid, p.140 [본문으로]
  25. 푸세 계획의 실패와 여타 5개국들의 반응을 보고 드골은 영국 가입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드골은 만일 영국이 EEC에 가입하면 EEC내에서 프랑스가 주도권을 확립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26. 이 기간 동안 프랑스 내에서도 드골에 대한 반대가 심해졌다. 퐁피두 내각의 각료 중 6명이 항의 사퇴를 했으며, 그 중에서 피에르 플렘린은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국가로 구성된 유럽은 우리들을 19세기 비엔나 회의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유럽 정치 공동체가 만장일치제 투표 방식을 택한다면, 유럽 정치 공동체는 아무런 장래도 없을 것이다." 장홍, ibid,p.140. [본문으로]
  27. 장홍, ibid., p.158. [본문으로]
  28. 바로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대선에서 드골은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공동체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드골은 그제서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프랑스에 안겨주었는 지 실감할 수 있었고,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본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29. 타협 자체가 정부간 타협의 산물이다. 이 결과로 앞으로 발전하는데 정부간 협조의 성격을 가진 연합체의 요소를 많이 지니게 되었다. [본문으로]
  30. 위기 극복에 대한 평가도 달랐다. 프랑스 정부와 골리스트들은 공동체가 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현실성을 띄게 되었고, 효율성 문제에서도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친유럽통합론자들은 유럽 건설의 방향이 정부 간 협력 시스템으로 전락했다고 한탄했다. 장홍, ibid., p.160 [본문으로]
  31. 미국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내에서 EEC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OEEC를 세계적 기구인 OECD로 개편한다. 이것은 영국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본문으로]
  32. 미국은 EEC를 축으로 유럽을 단일화시키고자 했다. OEEC를 OECD라는 세계 기구로 개편한 것도 그와 같은 전략의 일환이었다. [본문으로]
  33. 같은 날 영국과 특별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아일랜드와 덴마크가 가입신청을 했고, 노르웨이도 1962년 4월에 가입신청을 했다. 이들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영국에 달려 있었다. [본문으로]
  34. 이런 입장은 영국 내 반대 여론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특권때문에 결국 영국은 EEC가입을 거부당했다. [본문으로]
  35.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국 가입은 더욱 복잡한 EEC내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 또 드골은 영국이 자신의 야망을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36. 이번의 가입신청은 첫번째 가입신청때 반대파였던 노동당 정부였다. EEC 가입의 필요성을 영국은 상당히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7. 여기에는 독일이 또 관련되어 있다. 브란트의 취임 이후 동방정책을 강화해가던 독일은 점점 동·서독 간의 화해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동·서독 간의 화해 가능성은 독일의 괴력에 대한 과거의 망령과 공포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는 EC 내에 효율 좋은 정책 결정 통로를 마련함으로써 서유럽에 서독을 견고히 묶고, 독일의 행동 반경을 제한하고자 했다. [본문으로]
  38. 스페인의 대규모 어업선단도 가입협상에 걸림돌이었다. [본문으로]
  39. 각 국의 기부금에 의존하던 기존 재정 체제가 각국의 조세 수입원으로부터 직접 징수하게 되었고, 아울러 유럽 의회가 이를 통제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40. 대표 사례로 걸프전과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민족분규에 대해서 EU는 적절한 정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른바 '경제 거인, 정치 난쟁이'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 '통합유럽'이라고 하는 이상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경향을 낳게 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본문으로]
  41. CAP의 무제한적인 팽창과 예산 고갈의 위협, 영국 문제, 미국과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산업경쟁력 회복, 스페인과 포루투칼을 포함하는 공동체 확대 문제, 그리고 역내 장벽의 제거 등이다. [본문으로]
  42. 앞서 언급한 두 종류 보고서는 모두 이러한 점을 지적했다. [본문으로]
  43. 1991년 12월 마스트리히트에서 체결된 것은 단순한 협정문이다. 조약의 형태를 갖추어 체결된 것은 1992년 2월 7일이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이라고 할때는 후자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44. 장홍, ibid., p.322. [본문으로]
  45. 장홍, ibid., p.325 [본문으로]
  46. 미국이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했으면서도 의회 비준 거부로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고 다시 고립주의 외교 정책으로 돌아간 것을 얘기한다. [본문으로]
  47. 대표 사례로 서독은 1955년까지 외무부를 가질 수 없었다. 외교권은 국가주권의 핵심사항인데, 외교를 담당할 부서가 없었다는 사실은 주권의 제한을 설명해줄 가장 적합한 예라 할 것이다. [본문으로]
  48. SPD 지도자 슈마허는 이에 반대하여 독일 민족 국가의 이와 같은 목표를 비판하였다. 그는 연합국 측에 유보된 주권이 핵심국가 또는 主國家로 이해되는 연방공화국에 이관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AndreasHillgruber, "Deutsche Geschichte 1945-86 - Die deutsche Frage in derWeltpolitk", 손상하역, {독일현대사 1945-1986} (서울, 1991) pp49-50. [본문으로]
  49. 한국과 비교했을때, 이것이 가장 큰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50. Andreas Hillgruber, 손상하역, ibid., p46. [본문으로]
  51. 노명환, '유럽통합, 독일의 분단과 통일', {서유럽연구} (1995년 창간호), p.39. [본문으로]
  52. 자세한 것은 빌리 브란트의 회고록의 제 1장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53. Bily Brandt, "ERINNERUNGEN", 정경섭역, {빌리 브란트 : 동방정책과 독일의 재통합(서울, 1990)}, pp78∼79 [본문으로]
  54. Bily Brand, 정경섭역, ibid.,p67 [본문으로]
  5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Brandt의 통일에 대한 신념은 민족주의 관념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는 오랜 정치 이념에 기원한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연구가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그의 동방 정책은 동구권 국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富國과 貧國간 관계에도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Brandt, 정경섭역, ibid.,70. 실제로그는 1980년대에 '남북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본문으로]
  56. 국가보안법과 남북기본 합의서. 이 두 개가 가지고 있는 희극같은 모순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본문으로]
  57. Brandt는 그의 회고록에서 "강대국의 긴장완화는 우리없이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독일의 정책은 전 유럽의 영역에그리고 유럽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친다"라고 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Brandt, 정경섭역, ibid., 사실 1960년대의 동·서 긴장완화의 시대에 동·서독은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에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브란트는 할슈타인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서독의 전통 외교정책에서 급선회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드골과 달리 EEC에 적극성을 띈 이유도 독일의 동방정책으로 서유럽 진영에서 이탈하고, 독일이 동방과 접촉을 통해 과거의 힘을 재현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브란트의 언급이 결코 빈말은 아니라고 하겠다. [본문으로]
  58. 그와 동시에 폴란드를 비롯한 여타 동구권 국가들과 차례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본문으로]
  59. 그 예로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밀려올 동유럽인들과 이에 따른 서유럽 지역의 실업문제를 들 수 있다. [본문으로]
  60. 노명환, op. cit., p48. [본문으로]
  61. 노명환, obid., p45. [본문으로]
  62. 이것은 독일 문제와 결부시켜서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재 EU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슈망 플렌(Schuman Plan)을 분석해 보면, 독일을 서유럽체제로 유기체로 결합시켜 통합함으로써 독일의 새로운 재침략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서독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역시 이러한 생각에 서유럽 통합에 열성이었으며, 이것은 그 후 역대 서독수상들도 충실히 따랐었던 것이다. 유럽 통합 운동은 본질을 정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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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goddls1.tistory.com BlogIcon 행인1 또는 甲士1 2009.12.20 11:01 신고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갑니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개념이 뿌리가 깊군요.

    • Favicon of http://dcafe.tistory.com BlogIcon deutsch 2009.12.21 15:17 신고 Modify/Delete

      뿌리가 깊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건 그 이상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이겠죠. 아직도 진행중이고 말입니다. 오랜동안 민족 내지는 지역 단위 "국가"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조금씩 전진해나가는 유럽인들의 인내와 의지에 감탄할 뿐입니다.

  2. 2344 2010.01.26 13:05 신고 Modify/Delete Reply

    오바미민주당전상원의원7870억달러경기부양법글라스스티걸법부활금융개혁법추진
    기업대출회피보너스잔치이민법(추진중)건강보험개혁10.2%(2009년10월)
    최고 43%(2007년3월-2009년10월)월가규제

  3. 2344 2010.01.26 13:08 신고 Modify/Delete Reply

    민주당주지사뉴딜정책1933년글라스티걸법예금자보호제도부실채권정리기구확대기업대출회피사회보장법
    25%90%폭락(고정대비)사회보장법

  4. 2344 2010.01.26 13:09 신고 Modify/Delete Reply

    루스밸트게인스적인정책

  5. 이번에 2010.05.12 22:05 신고 Modify/Delete Reply

    포럼에 이 자료의 일부 -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의 관계 - 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인용해야 할까요? 논문 쓰신 분의 성함과 논문의 제목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인용하기가 힘들어서 이렇게 글 남깁니다.

    • Favicon of http://dcafe.tistory.com BlogIcon deutsch 2010.05.13 00:09 신고 Modify/Delete

      논문 제목은 이 포스팅의 제목입니다. "유럽통합과 독일통일". 그리고 제 이름은 김종현이라고 합니다.

  6. 이긍정 2010.10.13 21:44 신고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ㅠㅠ 학부생인데 낼 모레가 유럽정치 시험이거든요 ㅠㅠ
    이 자료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ㅜㅜ

    kmn43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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