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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사 개론 (5) - 초기 부르죠와 혁명 : 16세기∼30년전쟁


독일과 유럽/독일사 2006.08.13 23:31

1. 16세기초 독일의 전환기
15,16세기부터 프랑스혁명때까지는 이른바 manufacture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이다. 이 때의 주요한 산업형태는 우리가 이른바 "선대제(putting-out-system;Verlag)"라고 부르는 체제이다. 선대제는 원거리 무역으로 갑부가 된 상인이 직접 생산에 관여하는 체제로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제공하며, 생산도구는 노동자가 소유한 채, 노동자가 상인에게 약속한 물품을 넘기는 방식이다. 16세기초 생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주석/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제련소. 제철소. 섬유 생산이 늘어났다. 생산수단과 부를 축적한 부르죠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농업에서도 자연 경제 중심체제가 뚜렷하게 화폐경제로 이행하기 시작했고(화폐지대의 출현), 부유한 농민층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토지에 목을 매달고 살던 기사와 하급 귀족들이 몰락,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사와 하급 귀족 중 일부는 근대식 관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아무튼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때의 독일에서 성직자수는 계속 증가했는데, 이는 독일이 로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며,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반교황/반로마의 감정) 배경을 이루게 된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력이 확장된 시기였다. 그들의 권력 확장은 주로 전쟁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결혼과 외교에 의존한 확장이었다. 보헤미아/헝가리/독일전지역/스페인 등이 합스부르크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의 몰락 과정 등은 폴 케네디著 "강대국의 흥망"에 잘 나와 있다.

초기 부르죠와 혁명의 단초는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술과 문예에 치중한 편이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다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으로 대표되는 북방르네상스이다.

2. 종교개혁
루터는 전혀 진보 성향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개혁을 보수 개혁이라고 한다. 카톨릭에서 보면, 전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르네상스는 표면상 굉장했으나, 실제론 몇몇 지식인과 예술가 집단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보수 행동으로 시작되기는 했어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사원(현재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이자 관광명소)의 건축을 위해 푸거가에 엄청난 돈을 빌렸었다. 스페인 카를로스 5세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입후보를 위해 역시 푸거가로부터 돈을 빌렸으나, 돈은 곧 떨어졌고 모잘랐다. 빚도 갚아야 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면죄부 판매였다. 특히 면죄부는 독일에 집중 팔렸는데, 성직자가 많았다는 것외에도 이를 제어할 중앙권려기 없었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확립되가던 영국이나 프랑스에는 팔지 못했다.

1517년, Martin Luther가 Witeemburg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독일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는 인간은 내면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세초기의 순수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의 행위는 훗날의 역사가가 표현한대로 "빠작 마른 짚단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1518년에 루터는 소환되었고, 1519년에는 에쿠라는 신학자와 토론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와 결별할 생각을 루터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순수한 기독교'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로마와 결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레오 10세는 1521년에 드디어 루터를 파문하게 된다. 그러나, 작센공인 Friedrich the wise가 마틴 루터를 숨겨준다. 루터는 이때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역사상 최초의 모국어 성서로서, 마치 세익스피어의 문학이 영어의 확립에 기여한 것처럼 독일어의 문법 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중이 성서와 문자를 인식하게 되면서, 독일의 민족주의 형성에 이바지하게 된다. 근대적 자본주의 이행에 나타나는 사상의 단초는 이때부터 형성된다. 루터의 사상은 신앙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faith),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 집약되며, "성서는 모든 대중이 읽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반 대중이 성직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신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근대 개인주의 사상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것에 관해서는Erich Fromm의"Escape from Freedom"의 제3장을 보라.

이 무렵부터독일에는 3가지 집단이 등장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중소 상공업자를 대변하는 집단과 교황권의 약화로 수많은 수도원의 토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다 독립된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대제후들 (루터를 보호한 작센공도 이런 경우다) 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보수 카톨릭세력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으로서 제후들, 고급성직자, 도시의 도시귀족들, 부유한 상층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다.


② 도시 시민 개혁집단(protestant)
서서히 상공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시민들. 하층 귀족들, 신성로마제국으로 독립과 수도원재산에 관심있는 제후들 등이다. 앞서 언급한 작센공도 이 경우이다. 1522년에는 루터에 자극받은 이들 기사단이 슈말칼덴 동맹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화약무기와 총포류의 발달로 기사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가던 때라 발악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③ 혁명 집단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농노,농민들, 일일노동자, 룸펜 프롤레타리아, journeymen(길드에서 마스터가 되지 못한 자들) 등, 1524∼1525년의 농민전쟁을 주도한 그룹이다. 이들은 민중설을 설교하는 토마스 뮌쩌의 사상에 더 감염된 집단이다. 루터의 개혁이 정통 귀족 성향 개혁이라면,토마스 뮌쩌 중심의 농민 반란은 민중 지향이며, 과격하고 급진 성향 종교개혁이다.

3. 마틴 루터의 사상 - 신앙을 통한 의인화
농민반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루터와 뮌쩌의 사상을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루터부터 정리를 해보자.

루터는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카톨릭에서처럼 교회와 성직자가 매개체가 아니라, 오직 성서만이 구원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루터는 로마교황파, 제후 영주, 농민 모두에 경고를 발했다. 로마 교황파는 "악마적 지배자"이며, 제후와 영주에게는 그들의 사치와 향락을 비판했다. 농민에게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국이 사악하고 부정한 것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악을 벌할 권한은 칼을 차고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의 권한이다. 신에 의하지 않는 권력은 없고, 권력에 반하는 것은 신에 반하는 것이다
루터는 영주들에게 또한 농민들을 "미친 개 잡듯이" 때려잡으라고 영주에게 충고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루터의 사고 방식은 매우 전근대적이며, 중엽의 Marsilius나 동시대의 마키아벨리와 매우 대조된다. 1525년에는 농민반란이 진압되었고, 뮌쩌는 처형당하지만, 이후 독일은 신구교 제후들간 30년간 종교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종교전쟁은 1555년 Augusbur 종교 화의로 일단락 짓게 된다. 서로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제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종교는그 영방을 다스리는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화의의 중심이다. 독일의 교회가 국가 중심의 국가 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되었으며,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게 된다. 마틴 루터의 사상은, 비록 보수적이기는 했으나, 많은 분파를 낳았다. 중도파에는 제네바의 칼뱅파, 영국의 퓨리탄(미국의 청교도로 이어짐), 프랑스의 위그노등이 있으며, 우파는 영국성공회, 좌파로는 재세례파, 퀘이커, Diggers, Levellers등이 생겨났다.

마틴 루터의 경제 사상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대두시켰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켰다. 직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 힘쓰는 것이 신의 계시라고 설파했다. 그의 직업사상은 소명의식, 과업의식으로 집약된다.

루터는 근검을 생활 원칙으로 하는 상공업자의 역할을 정당화했으며, 이는 칼뱅에 의해 정리된다. 루터의 직업윤리는 현실직업에 성실한 것이 도덕적인 실천내용의 최고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저자 막스 베버는 이른바 세속 향략을 배척하고 이치에 합당한 이윤 획득을 소명으로 삼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추구하는 정신 형태를 "자본주의 정신"이라 칭한 바 있다. 이것이 서양근대에 나타난 자본주의 정신이며, 그 계기를 신교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엄격한 시민적인 생활관과 윤리관을 지닌 부단히 향상하려는 중산계급에 의해 창조된 정신이다. 금욕, 절제, 근면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이는 시민적인 직업관이 되었다. 캘빈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한 인물인데, "예정설", 즉 "신이 어떤 인간을 은총으로 예정했다. 이 증거는 세속 생활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의해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루터에서 캘빈으로 이어진 이러한 사상은 종교가 영리 활동을 합리화/정당화 해놓은 것이었던 반면, 현 세계의 재산불평등과 차별을 신의 섭리로 돌리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Weber의 주장대로라면) 캘빈을 거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이어진 직업의식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도 하나, 동시에 농민적 생활을 찬양하면서 상업과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불평등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며, 농노제는 사회에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없이는 건설할수 없다,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루터는 아직 중세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타락상을 극복하기 위해 초기 기독교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는 권위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이완되는 것을 반발한 것이다.

R.H.Tawney가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한길사 번역출간)》을 냈는데, 그는 이 책에서 Weber의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전면 비판하고 있다. 루터,켈빈등의 Purtitanism은 결코 근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자기적응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일으키는데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강장제 역활을 했으나, 결정적인 역활은 하지 않았다고 토니는 주장하고 있다.

※ Luther와 농민들의 생각의 차이
Luther는 순수한 종교 입장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었지, 개혁가나 혁명가 입장에서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교의적·성서적·신학적 측면에서 면죄부 판매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요구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회경제적 입장에서 자신들에 대한 로마 교황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Luther의 종교개혁을 해방운동과 결부시키게 된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 교황권이나 교회의 계층제 자체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의 차이는 훗날 농민전쟁이 일어났을때, Luther가 농민들을 두고 "폭도"라고 불렀던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Luther는, 인간의 구제는 카톨릭교회가 명한 은층을 획득하기 위한 외적 행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식적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 신앙을 더 중요시하였다(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져야함).반교황파의 인문주의자들이 Luther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은 속도가 빨라졌으며 Luther는 독일국민의 영웅이 되었다.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강령이랄 수 있는 세가지 논문을 발표한다.

  • 『독일국민의 기독교적 귀족에 대한 호소』 ; Luther의 종교개혁의 발전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님.
  • 『교회의 바빌론유수』
  • 『기독교인의 자유』 : 세속 권력으로서 교회 권력 부정(중세적 사상) 영방군주와 결탁, 영방군주에 귀속,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영방군주에게 얽혀 매임. 국민적 영웅에서 이기적 권력정책의 도구가 됨. 점점 독일농민들과 멀어지게 된다.("정치세력과 종교개혁의결탁")

☞ 『기독교인의 자유』에 나타나는 두 가지 모순
  •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 "모든 것에 종사하는 하복으로 누구에게나 종속한다."

이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을 한편으로는 영적 정신적 존재로 내적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 육체적 외적 인간이라는 의미,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이원적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자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외적 행위로써가 아니라 내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때문에 국민의 영웅으로서 추앙받는 면과 정치적 도구화라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루터의 보수 성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4. 토마스 뮌쩌의 사상
1850년에 엥겔스는, "Der deutsche Bauern Krieg(독일농민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는 봉기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모든 농민은 경제 요소에 의해 봉기했다.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무신론자에 불과하다.

최초의 영웅적인 공산주의자이나, 동시에 비극의 영웅이다. 아직 부르죠와혁명이 막 시작될려는 시대에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엥겔스가 언급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토마스 뮌쩌이다. 독일농민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뮌쩌는 재셰레파(태어나자마자 받는 세례부정, 내면적 계시 주장)의 지도자였다. 그가 직접적 사회개혁을 처음부터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종교적 개혁이었으나, 후에 정치개혁을 하게된다 종교를 매개로 근대화운동을 펼친 것이다. Luther는 이를 "난동"으로, 농민들을 "폭도"로 매도한 이후 Luther와뮌쩌는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뮌쩌는 "무식해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성서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 신이 나타난다.", "죽은 글자가 아닌 순수한 사고"를 주장했다. 성서는 외부적인 것이고 교육적인 가치를 가진 오랜 역사의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실제로 구약성서는 유태인의 역사서임). 성령은 복잡한 이성에 왜곡받지 않는 순수한 사고에 나타난다. 성령이 나타나면 인간은 성령의 내적고민을 통해 '고난'을 겪게 된다. 성령->공포/혼란(고난의 단계)->자기 포기역사의 종말론적 단계에서 하느님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참신자는 무력을 사용하고 불신자를 제거, 참신자로 이루어진 동맹(선민동맹)이 무력사용으로 불신자를 처벌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다는 것이다. 그는 루터의 사상을 "문자주의 신앙"이라 비판했고, 민중을 역사의 객체(신의 은총을 받기만하는 사람)로 본다고 비판했다. 뮌쩌는 민중을 행동의 주체로, 농노제를 부정하고, 교황제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5. 농민전쟁 : 1524∼1525
연구사부터 정리해보자. 연구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익과 좌익, 그리고 중도적 해석이다. 우익은 정치적 해석이 주가되는 것으로 농민봉기의 원인을 연방 군주 권력과 농민공동체 권력 간의 정치 대립에서 찾고 있다. 농민은 관습법(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에 연연하는 데 비해, 영주 계급은 로마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농민들이 법적 관계를 둘러싸고 영주계급과 충돌을 빚은 것이 1525년 농민봉기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좌익 해석은 Marxism적 해석이다. 그들은 1525년 독일농민전쟁을 초기 부르죠와혁명으로 파악한다. 당시 독일은 아직 부르죠와 혁명이 수행될만한 생산력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부르죠와가 아직 미성숙하므로 농민층의 힘을 빌어 부르죠와 혁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종교개혁이 부르죠와 혁명의 첫번째 시작이고 그 와중에 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근데 뒤에 살펴보면 알겠지만, 독일의 부르죠와는 다른 나라의 부르죠와보다 그 힘이 약했다. 차차 살펴보게 될 것이다).

중도적 해석가들은 사회사가들이다. 농민전쟁을 부농이 지도했다고 본다. 자신들이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자 봉기했다는 것이다. 농민봉기가 도시시민과 봉기와 관련지어 일어났다. 이 계열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14세기 이후 농민봉기의 성격은 그 이전과 비교해 성격이 달라졌다. 14세기이전의 농민반란은 장원내의 영주폭정에 저항하는 것이 주요한 성격이었다. 세금 감면, 부역 감면 등을 주장하면서 장원의 경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300년 이후 농민반란은 두 가지 면에서 달라졌다.

우선 규모면에서 넓은 지역에서 여러 장원내 농노들가에 연락으로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이는 자급자족경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이때에 상품유통이 영주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성격도 변했다. 이전엔 자발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정도였으나, 이때에는 지도자중에 상공업자와 수공업자가 많았으며, 빈농보다 중농/부농이 더 많았다. 지도자의 성격도 농촌 부르죠와나 도시부르죠와가 선구자적 역활을 많았다. 좌파 학자들은 발전중인 부르죠와가 농민들과 힘을 합하여 일으킨 난으로 농민반란을 평가하기도한다. 와트 타일러의 난때, 농민군은 여러 봉건적 속박의 철폐와 함께 "상품매매의 자유"를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 슈바르쯔발트(흑삼림지대)에서 시작된 봉기는 곧 독일의 서남부로 번져갔고, 독일의 1/3이상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뮌스터를 점령하고 농민 왕국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12개조 요구를 제시하였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농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목사(사제)선출권을 갖도록 해달라", "십입조를 폐지하라(교회의 농민에 대한 압박과 착취거부)","인신예속을 폐지하라","수렵, 어로, 사냥권은 산림채취는 공동권으로 영주가 세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부역과 지대를 감면하라, 귀족, 영주의 사냥을 금지하라", 등등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바로 영주와 교회였다. 농민군은 곳곳의 교회와 수도원을 습격하여 파괴했다. 그러나, 적절한 지도자의 부재와 지역에 따라 온건파의 과격파의 이해관계 대립심화로 공동전선을 펼지지는 못했다. 보수 카톨릭과 신교파 제후들이제후연먕을 구성하여 농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섰고, 뮌스터의 농민왕국은 곧 무너져버렸다. 이후 오히려 독일에서 농노제는 강화되었으며, 재판농노제가 19세기까지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농민 공동 자치를 통한 근대 영역 국민 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 농민은 원래 가지고 있던 구권리(영국에서는 "생득권")를 보유할 권리를 가진다. 구례의 관습법 무시. "구권리는 영방제후와 교황에 의해 침해당하므로 구권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어섰다."라고 주장→ 독일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침

< 결과>
루터의 개혁은 이로써 북중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농민전쟁발발시점을 계기로 농민과 Luther와의 관계는 벌어졌으며, 루터는 정치화한다. 영방교회제 확립을 위해 루터를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코자 했던 지배층이 끌어들였고, Luther는 지배층에 결합한다. 점점 Lutherism은 스콜라학 문화함. 1529년 가을엔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와 결별했던 Luther는 Zwingli파와도 결별한다.

점점 Lutherism은 한정된 교의 지역안에서 도그마(dogman)가 된다. Luther개혁의 보수성은 멜랑크톤이 "카톨릭 바탕에......"라고 언급한데서 그들의 보수성을 잘 알 수 있다. Luther는 슈말칼덴 전쟁 직전인 1546년에 죽었다.

재판농노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엘베강동쪽, 북동쪽등지에서 재판농노제가 강화되었고, 반란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농민의 경제 상황이 근본적으로 열악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융커(Junker들에 의한 대농장(Gutsherrschaft:농장영주제, 서유럽의 일반 장원은 독일어로 Grundherrschaft라 불린다)제도 강화되어 곡물수출위주로 나간다.

이러한 대농장 제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5세기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시장권의 통일은 1834년(독일 관세동맹 성립)까지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농장제도의 성립으로 여러 군데에 경제중심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동부 독일(현재 대부분 폴란드 영토로 되어 있음)에서는 또한 농민 분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자본주의로 이행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융커계급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농촌-특히 동부독일-에는 봉건적인 속박이 그대로 남게 된다. 수공업에서도 길드(Zunft)의 여러 제한조치가 그대로 남게되었다. 경제적이나 법적으로 자유로운 임노동자의 계급형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시적,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좌파사가들의 주장대로라면) 초기 부르죠와 혁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르죠와가 혁명에 성공했더라면 부르죠와의 성장에 봉건체제는 낡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고, 없에야 하기 때문이다. 1555년 이후에도 독일의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반동권력에 의해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한다.

< 요구 >

극단적 복음주의를 주장하였으며, 중세적 속박에서 벗어난 농민들의 공동체를 세워 살자는 기독교적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영방군주와 상업자본에 적대적이었다.
☞ 한번 생각해봅시다 :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절대국가시대)에 있어서 상업자본의 역할이란 막대한 것이다. 상업자본 없이 산업자본으로 넘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상업자본에 농민들이 반대하였다면, 농민의 주장은 시대역행적인가?

※ 농민과 Luther의 차이
가) 농민의 "만인평등" - 지배자에 왜 복종하는가?
나) Luther의 "만인평등" - 지배자에 복종! (신앞의 신앙상의 평등), 봉건제후옹호, 기독교적 신분옹호

6. 중세 독일 정치사
1152년 호엔슈타우펜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서거하면서 호엔쉬타우펜 가문은 종말을 고했고, 룩셈부르크 왕가에 이어 오스트리아의 제후였던 합스부르크가 대신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태리 문제(호엔쉬타우펜)와 국내 문제에 매달려 제대로 왕 역활을 하지못했고, 수십년동안 황제가 없는 촌극(대공위시대)을 연출하기도 했다. 황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영방제후들의 준동이 큰 역할을 담당했고, 또, 그럴수록 황제권은 약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정치생활의 중심이 제후들의 영방국가로 이동한 것이다. 농민반란 실패 후 융커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중앙권력은 더욱 약해졌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독일에 침공할때에도 독일은 1천여개의 영방국가로 난립한 상태였으니, 그나마 이것도 많이 줄어든 것이다. 17세기에는 2000여개였다. 대공위시대 이래 독일에서는 영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한편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중앙권력이 존재하는 2원화된 형태로 6세기 가까이 유지된다. 농민반란은 부르죠와나 농민에게 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긍정적 결과는로마카톨릭교회가 독일내에서 세력을 잃었다는 것 뿐이다. 적어도 이중의 고통에서 한 짐은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익을 얻은 것은 독립성을 쟁취한 귀족들뿐이다.

7. 삼십년전쟁
30년 전쟁은 독일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이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 된것이다. 크게 두 세력이있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스부르크 왕조 및 카톨릭 연합 세력, 그리고 초기 부르죠와와 다른 귀족들간의 연합세력이다. 나중에 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독일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는 두 국가가 나오지만, 이때는 아직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국에 불과한 처지였다. 프로이센은 이땐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이다.

전쟁의 시작은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단계에서는 보헤미아와 팔츠간에, 제2단계에서는 덴마아크와 네덜란드의개입, 제3단계에서는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 제4단계에서는 스웨덴군을 도와 프랑스군(카톨릭인데!)이 개입한다.
이 전쟁으로 독일전체는 피폐화되었고, 인구의 1/3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등에서 일시적으로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나나 실패하기도 했다. 1648년에 맺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사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왕국이 될수 있었다.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 제국의회에 선거권을가지게 되었다. 이는 이 두 강국(당시엔 스웨덴은 군사강국이었음)이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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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versobooks.com/books/klm/m-titles/muntzer_t_sermon_to_the_princes_rev.s.. BlogIcon 보스코프스키 2009.12.27 21:42 신고 Modify/Delete Reply

    2009년이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연휴 마지막에 흔적 남기고 갑니다. 버소북스 혁명신서 연속물에 토마스 뮌[뮨]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동 연속물을 번역한 프레시안 혁명신서의 3차 분으로 발행예정인데 원서 밖에 없긴 하지만 시간 있으면 참고해 보십시요.
    http://versobooks.com/books/klm/m-titles/muntzer_t_sermon_to_the_princes_rev.shtml

    • Favicon of http://dcafe.tistory.com BlogIcon deutsch 2009.12.28 14:46 신고 Modify/Delete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흔적 남겨주셨네요. 제가 영어는 짧은 편이라 어찌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리고 뮌처는 Thomas Müntzer이니 "뮌"이 더 가까운 발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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