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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역사가 논쟁 >


독일과 유럽/독일사 2006.12.25 15:00

지난 1980년대 말, 독일에서는 이른바 [역사가논쟁]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1986년 Nolte란 학자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지에 발표한 한 에세이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다. 이 논쟁의 특징은 어떤 역사적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좌파와 우파의 정치투쟁에 가까운 그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논쟁의 시발점이 된 놀테의 에세이다. 아래 자료는 온누리출판사에서 구승회씨가 출판한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라는 책이다. 여기에 올리는 원전들은 모두 그 책에서 옮겨오는 것들이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독일의 [역사가논쟁]은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의 의식변화와 과거사의 인식문제, 그리고 나치즘의 인식문제에 대한 것들이다.

1. Ernst Nolte - 사라지지 않을 과거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고 할 때 '과거'라는 표제어는 당연히 독일과 독일인의 [나치과거]를 의미한다.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이 테마가 말해 주듯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예외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과거가 정상적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소멸하는' 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의 시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트시대는 역사적 작업을 통해 부단히 현재화된다. 그러나 이때 과거는 분명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억압과 고통이 소멸한 <역사화된> 과거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과거는 역사가들에게 '역사'로 주어질 수 있다. 최근에 헤르만 뤼베(Hermann Luebbe)가 강조한바 있듯이 [나치즘의 과거]는 현상적으로 이러한 억압과 고통이 소멸되거나 약화되는게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가진 과거이다. 그것은 본받을 만한 역사상이 아니라 놀라운 그림으로 있다. 이는 현재라는 시간적 좌표위에 매달려있는 단죄의 칼처럼 구체적인 현재로 자리잡고 있는 과거이다.

<흑백논리>
그렇게 된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연방독일 혹은 서구사회가 '복지사회'로 발전이 명백해질수록, "우리들의 죽음이 축제가 될 것"이라는 에다(Edda)의 시 귀절처럼 나치 시절 학교축제에서 합창으로 울려퍼지던 "버터보다는 총"이라는 신조가 말해주듯, 전쟁에 희생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제 3제국의 <호전적> 이데올로기와 그 형상은 더욱 혐오스러운 것으로 부각될 것이다.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1933년부터 39년까지 그랬던 것이상으로 오늘날 두 초강대국은 해마다 엄청난 군비확대를 도모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치의 主戰主義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그 결과 여전히 피아를구별하기 어려운 현재의 혼돈보다는 차라리 명백한 적인 <나치즘>을 고발하는 근본적인 불안정이 있다

오늘날 페미니즘에도 이런 유사성이 있다. 나치주의는 도발적인 자의식에 의한 '남성적 광기'였다. 현대에 와서 이런 광기는 나치즘이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현상양식에서 현존하는 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독일연방이 국제무대에서 중간쯤 가는 국가로서 역할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히틀러의 '세계지배' 야망은 더욱 두드러지게 될뿐, 독일연방의 국제무대에서 일정한 역할이 어떤 '선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예 검토되지 않는다. 독일이 3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겠지만, 그 시발점을 될 수 있다는 등, 다방면에 걸쳐 [독일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나치 과거가 과거가 되지 못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유대인말살'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독일연방이 헌법으로 인권을 수호하는 국가의 전위로 서겠다고 선언하면 할수록 수백만에 대한 참혹한 살인과 살인공장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은 바로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외국인들도 '법치국가(pays regal)'와 '현실적인 국가(pays reel)'를 동일하다고 믿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다만 사라지지 않는 과거를 거역하고 이제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현실적인 국가'의 냉혹함인가? 그렇게 도면 독일 과거사는 이제 더 이상 다른 나라의 과거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가? 수많은 주장과 질문 속에 올바른 문제의 핵심이 숨어있지 않단 말인가? 수많은 주장과 질문 속에 올바른 문제의 핵심이 숨어있지 않단 말인가? 동시에 '나치즘 논쟁'을 계속하자는 요구를 거부하고 벽을 쌓을 [새로운] 주장은 없는가? 나는 이런 "잘못된 것"에 관한 하나의 개념을 전개하기 위해 이런 주장과 물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작업은 성가신 과거를 "복원"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종지부"를 찍는 것과도 거리가 먼 "논쟁"을 개괄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부정적인 데 강조점을 두고 '관심'을 표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 과거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는지, 또 지금도 관심이 있는지 '조상'에 대항한 저 낡은 싸움에 대한 신세대의 관심 혹은 나치의 앞잡이로 추적당하는 사람과 그 후손들의 불변하는 존경과 특권의 지위에 대한 관심에 대해 묻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독일인들의 죄'를 논함은 나치들이 주장했던 '유대인의 죄'를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성을 아주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 '독일인'에게 모든 죄가 있다고 말하는 독일인 스스로의 비난은 전적으로 부정직한 처사인데, 왜냐하면 독일인들의 죄를 고발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단순히 옛 감정이 남아 있는 적대자에게 결정타를 가하고자 할 뿐 자신이나 자신이 소속한 집단은 결코 이 비난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태인 말살'에 주목하게되자 나치시대의 중요한 사실, 즉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을 죽이는 것, 그리고 러시아 전쟁포로의 취급 특히 현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이를 테면 '낙태'라든가 지금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족살인' 등의 문제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나란히 제기되는 주장으로 -- 그 하나에 우선순위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관철될 수 없는 -- 역설적이고 기이한 것으로 표현되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다. 최근 유태인 조직의 대표의 요구에 대한 어떤 연방의회 의원의 성급한 의견개진이라든가, 혹은 어떤 지방 정치가의 실언은 바이마르 시대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기억이 이미 완전히 사라진 양 "반유대주의"의 징후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태계 감독이 만든 기록영화 [쇼와(Shoah)]가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죽음의 수용소에 배치되어 있던 비밀경찰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희생자라고 할 수 있으며 나치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인들 중에도 투철한 반유태주의자가 <많이> 있었다는 등 몇 몇 장면 아주 그럴듯하게 묘사하고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비트부르크 군인묘지 방문은 매우 감정적인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혹시나 나치의 군인묘지 참배와 그것을 '상쇄'하고 '비교'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1953년 아데나워 전 연방수상이 독일 민간인을 테러공격했던 군인들이 묻혀있다는 이유로 엘링턴(Arlington) 연합군 묘지를 참배하기를 거부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실로 단순한 물음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과거가 과거로 되지 않는데서 오는 가장 개탄스러운 귀결은: 이로써 모든 과거에 공히 타당한 가장 기본적인 규칙마저 무너진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과거는 그 복합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고 동시대인들의 흑백논리의 싸움이 개선되고, 이전의 역사기술방식이 수정됨으로써 그 역사적 연관이 더욱 명료하게 되는 원칙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규칙을 제 3제국에 적용하면, '국민교육상 위험한 것'이 된다는데 있다. 이 규칙은 히틀러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데, 혹은 최소한 '독일인들의 자기변명'에 활용될 수는 없는가?

이에 대한 짧고 명쾌한 대답이 있다. 1945년 3월 독일인은 모두 죽이라는 연합군 측의 명령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독일인 그 누구도 히틀러를 옹호하려고 마음먹을 수 없다. 독일인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 배울수 있으려면, 그것은 역사학자나 저술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관계의 총체적인 변화와 두 번의 큰 패배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때 가능하다. 물론 독일인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을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반파시즘적'인 노선에서만 가능하다. 끊임없는 논란의 단계를 뛰어넘어 제 3제국과 그 통수권자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형상을 그려내기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와 세바스치안 하프너Sebastian Hafner)의 이름을 드는 것으로 우리의 그러한 노력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두 사람은 그러나 일단 '독일적 관점'에서 나치즘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아래에서 나는 몇 가지 질문과 단서가 되는 핵심구절로 나의 [나치과거]에 대한 관점을 암시하고자 한다. 오로지 이 관점에서 우리의 과거는 고찰되어야 하며 이는 철학과 역사학의 원칙적인 요청이다. 우리는 과거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 공평하게 대우한다는 말은 그러나 동일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명쾌한 핵심어>
히틀러와 밀접한 친분을 가지고 함께 일했고, 1923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 폭동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던 막스 어윈은 그전 1915년에는 에르퐗움(터키의 지명)의 독일 영사로 일했다. 막스 어윈은 거기서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종족학살로 기록될 수 있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의 추방을 목격하게 된다. 위험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그는 터키 관리들에게 대항하며 자서전을 준비했다. 1938년 완성된 그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독일정부로부터 직접적인 경고도 무시한 터키 정부의 절멸 의지에 대항하고 무자비하게 날뛰는 쿠르드족의 야만과 급속도로 진전되는 재앙에 대항해서 유럽 문명과는 아예 거리가 먼 아시아적인 방식에 따라 아시아의 한 민족이 타민족과 싸웠던 이 소수의 인간들은 무엇인가?"

만약 막스 어윈이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를 대신해 점령지 장관으로 있었다면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무엇이었으며, 거부했을 일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히믈러 그리고 로젠베르크와의 심지어는 자신과 히틀러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한 게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무엇이 군인들로 하여금 막스 어윈이 "아시아적" 이라고 느꼈던 잔악한 양민학살을 자행하게끔 했을까? 명백한 한 문장이 있다:1943년 2월 1일 당시 스탈린그라드에 진주해 있던 제 6군의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들 중 몇몇이 소련군의 심리전에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예언을 했다. "이들은 자신이 <장교들> 모스크바로 들어왔으며, '쥐틀'을 상상해야 한다. 거기서 그는 모든 것에 서명하고, 자백하고, 점호할 것이다."

주석가들은 히틀러가 "루비양카"를 염두에 두고 "쥐틀[쥐우리]"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는 옳지 않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보면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빅브라더'의 사주를 받은 비밀경찰에 의해 장시간 고문당하고, 자기 애인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긍지마져 포기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리고 취조관은 굶주린 쥐가 들어있는 쥐틀을 윈스턴 스미스 머리 앞에 놓고, 쥐틀의 문을 열겠다고 위협한다. 결국 윈스턴 스미스는 허물어지고 만다. 이 이야기는 오웰이 고안한 이야기가 아니라 러시아 내전에 관한 반볼쉐비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특히 신뢰할만한 사회주의자 멜구노프의 글에도 나온다. 원래 이 이야기는 '중국 비밀경찰'에서 왔다.

<수용소군도와 아우슈비츠>
대량학살을 위해 기계적인 방식을 채택한 것을 빼고,수백만의 무고한 사람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하고, 총살하고, 고문하는 나치의 범죄는 이미 20년대 초반의 문헌에 충분히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또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치에 관한 문헌이 갖고 있는 중대한 결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보고는 아마도 과장된 것일 것이다. 설령 <볼셰비키>의 "부르죠와의 구축"과는 아무런 유사성도 없지만 [나치의] "백색테러" 역시 끔찍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나치와 히틀러는 어쩌면 자신들도 바로 '아시아적인 야만;의 잠재적인 혹은 실제적인 희생일자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아시아적인' 짓을 자행했지 않았을까? '수용소군도'는 아우슈비츠보다 먼저이지 않았는가? 볼셰비키의 '계급살인'은 나치의 '종족살인'보다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우선하지 않았는가? 히틀러의 섬찍한 행위는 자신이 '쥐틀'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사실로써 설명될 수 없는가? 아우슈비츠는 어쩌면 그 근원이 사라지지 않으려는 어떤 한 과거로부터 온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기억속에서 사라진 멜구노프의 책자를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회피해 왔다.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반공이데올로기 혹은 냉전의 산물로 간주했다. 이런 질문은 언제나 작고, 구체적인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전문과학에 어울리는 물음도 아니다. 고의로 진리를 숨겨두는데는 도덕적 이유가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는 관습적인 과학의 태도에 위배된다.

이러한 심사숙고는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를 테면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숙명이라 생각되었던 진보와 발전의 '원흉'과 '죄인'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유럽사의 질적인 붕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단지 사건의 정황과 의문에 국한시켜 볼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이런 유럽적인 범주에서 보면 모든 비교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생물학적'인 인종말살 계획은 볼셰비즘이 기도했던 '사회적인' 말살정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비로소 분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살인행위가 -- 설령 그것이 대량학살이라 할지라도 -- 다른 살인에 의해 '정당화'될수 없다. 설사 [아우슈비츠와 수용소군도간의] 인과적 연관이 그럴싸해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의' 살인, '하나의' 집단살인에만 -- 아우슈비츠 --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살인에 -- 수용소군도 -- 대해서는 알고자 하지 않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나치역사를 신화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본질적인 연관을 파악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우리의 과거사 아무리 암울하고 경악스러운 것일지라도, 만약 동시에 나치 범죄의 당혹한 새로움이 그 후손들에게 의미를 가졌다면, 우리는 행위자를 이해해야 하며 집단주의적 사고의 독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울러 이는 행위와 사고 그리고 전통에 관련된 -- 즉 정부나 다양한 조직에 관련한 -- 비판인 한, 이를 허용하고 고무하는 자유로운 질서의 원리로 결정적인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 "러시아인들", "독일인들" 그리고 "소시민계급"에 대한 비판과 같은 개인으로서 해결할 수 없거나 해결하고자 한다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사실에 대한 비판에 금지의 낙인을 찍어서는 안된다. 나치즘에 대한 논쟁이 이런 집단주의적 사고에 빠져 있는 한,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가 나치 과거에 대해 무감각과 자기만족에 빠져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여하튼 간에 유용성에 따라 진리가 좌지우지 되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특히 지난 두 세기 간의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하나의 포괄적인 토론은 모든 과거가 그러하듯이 지금 우리가 테마로 삼고 있는 과거를 '"과거가" 되게 하는 것일 것이요, 또 과거를 돌려주는 일일 것이다.

주1) 구승회,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 -독일현대사 논쟁의 중간결산과 비판} (온누리, 1993.11.), 이하 {논쟁}
주2) Frankfurt Allgemeine Zeit(이하 FAZ), 1986년 6월 6일자.{논쟁}에서 재인용. 이 글로 인하여 독일 역사가 논쟁이 시작된다.
2. < 손비처리; 독일 현대사 서술의 변명적 경향 >
위르겐 하버마스(Juergen Habermas)
이 글은 앞에 소개한 놀테의 글에 대한 반박의 글로 1986년 7월 11일 {Die Zeit}지에 실렸다.

< 1 > 에어랑엔의 역사학자 미하엘 슈티르머는 역사인식의 기능적 해석을 좋아한다. "역사가 없는 나라에서 기억으로 충만되고, 개념을 각인하고 과거를 설명하는 자는 미래를 얻는다." 70년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구체화된 요아힘 리터(Joachim Ritter)의 신보수주의 세계상이라는 관점에서 슈티르머는 근대화 과정을 일종의 손비처리로 가정한다. 개별적 주체가 <경험하는> 불가피한 소외는 그들이 산업사회 주변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회분자(Sozialmolek l)"로서 동질성을 촉진하는 의미와 상쇄되어야 한다. <이 말로> 슈티르머는 확실히 개별자의 동질성보다는 사회적 존재의 통합을 더 고려한다. <슈티르머에 의하면>, 가치와 관심의 다원주의는 "그것이 공통된 지반을 발견하지 못하면 (………) 조만간 내란으로" 유도된다. 지금까지는 종교로서 민족과 애국을 성취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지금 "의미를 고양하는 일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책임의식이 있는 역사과학이라면 새로운 역사상을 세우고 그것을 전파하라는 소리를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전문역사가는 여하튼 "집단적이고 대부분 무의식적인 욕구를 통해 내적 세계의 의미설정을 따라 수행된다." -- 슈티르머는 이를 철두철미 하나의 딜레마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전공으로서 역사는 "과학적 방법으로 완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문역사는 "의미진작과 탈신화화 사이에서 고민한다."

맨 먼저 쾰른의 현대사 교수 힐그루버의 고뇌부터 살펴보자. 서적 애호가의 취미로 {이중의 몰락}이라는 제목을 붙혀, 볼프 욥스트 지들러(Wolf Jobst Siedler) 출판사에서 펴낸 힐그루버의 책은 문외한을 위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전공자가 갖는 경쟁심없이 나는 이 유명한 현대사 교수의 최근의 작업을 세밀하게 접근해보고자 한다. 자신의 역사인식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해부를 시도하는 환자에 대한 나의 관찰을 여기에 적어본다.

이 책 1부에서 힐그루버는 전쟁 막바지인 1944/45년 사이에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몰락을 서술하고 있다. 모두(冒頭)에 그는 자신의 서술에서 당시 자신이 참여했던 당파와 자신의 서술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이른바 "동일화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현장의 명령권자, 지도관, 시장의 책임윤리적 태도에 대립해서, 1944년 7월 20일 군인들의 상황파악을 단순한 "관습윤리"로 처리해버렸기 때문에 세 가지 입장만 남아있다.

첫째, 힐그루버는 히틀러의 일관된 관점을 사회진화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둘째, 승리자와의 동일화도 고려하지 않는다. 셋째, 힐그루버에 의하면 해방의 관점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태인 희생자들에게만 적용되고, 전 독일민족의 비극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역사가는 오로지 한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 "적군(亦軍)의 복수심 앞에 처참히 죽어간 독일시민들, 강간, 집단학살,무차별적인 강제수용을 막고 서쪽으로 탈출구를 봉쇄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역사가는 분투한 동부 독일 시민들, 절망한 동부군, 그리고 동해(Ostsee)에서 분투한 독일해군 병사들의 구체적인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우리는 40여년이 지난 1986년에 와서도 역사가들은 왜 좀 반성적 --- 회고적으로 시도하지 못하는지 반문하게 된다. 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수용하지 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들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한 당파 <우파 보수주의>의 선택적 인지에만 연관지우고 서로 형평을 고려하기 위해, 또 후학들로부터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해석학적 편의를 제시한다.

힐그루버는 그러나 "정상적인" 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절멸전쟁의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 문제는 괄호밖에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힐그루버는 오로지 독일 "동부"에 매달려 있는 한, 수용소에서 유태인 말살은 계속될 수 있었다는 "노베르트 블륌(Nobert Bl m)의 발언을 회상한다. 이 사실때문에 예를 들어 넴머스도르프의 재탈환후 독일군들이 보여주었던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부녀자와 어린이의 처참한 장면"은 언제나 어둠에 갇혀 있게 되었다.

힐그루버에게 중요한 것은 용감한 군인, 절망한 시민, "믿을만한"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고위층의 시각에서 '사태'를 서술하는 것이다: 그는 <사가로서가 아니라> 전투를 한 사람의 경험으로 이를 서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도는 자신의 책을 "동부 독일의몰락"과 "유대인 말살"이라는 두 과정으로 나누는 근거가 된다. 얄팍한 책자에서 스스로 천명한 "혼돈스러운 뒤얽힘"을, 그는 그러나 풀어내지 못한다.

< 2 >
슈티르머가 언급한 '의미를 진작시키는 역사 (sinnstiftender Historie)'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관대히 고려해야 하는 이런 <수정주의적> 해부를 한 다음 힐그루버는 동부지역에서 독일인들의 강제 추방은 결코 그들이 저지른 유대인에 대한 범죄의 "대답"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그의 책 [서문]에서 한 주장을 증명하기 이해 거리낌없이 젊은 역사학자들의 지식을 요구한다. 그는 연합군이 "프로이센과 독일 동부지역의 대부분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독일이 지는 경우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전쟁초기에 연합군은 독일의전력을 과대평가했다] 전쟁을 수행했던 연합군의 전쟁목표를 근거로 증명한다. 여기서 그는 "프로이센에 대한 상투적인 편견(군국주의적이라는)"을 가졌던 연합군의 무관심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런 연합군의 편견이> 제국의 권력구조,특히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사회구조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학적 정보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적군(亦軍)의 침공으로 무법처지가 된 것은 비단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걸 가지고 스탈린 시대의 야만적인 "전쟁수행"에 귀결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이 프로이센의 궤멸이라는 환상적인 전쟁목표에 현혹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연합군은 소련군의 진주로 "유럽 전체가 1945년의 재항의 패배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런 장면에 대해서는 오로지 힐그루버만이 독일 동부군의 "분투"와 "연합군의 의지로는 분쇄되어야 할 강대국 독일제국의 자주성 유지를 위해 싸운 절망적인 방어전쟁"을 올바르게 조명할 수 있다고-- 힐그루버는 동부전선의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생각한다. 힐그루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독일 동부군은 수백년 동안 독일인의 거주지가 되어온 영토를 지키고 독일제국의 핵심적인 지역에 사는 수백만의 고향을 지키는 보호막이 될 것을 제안했다." 힐그루버의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남긴 채 1945년 5월 8일 끝을 맺는다. "(………) 동시대인이, 함께 싸운 사람들이, 혹은 [이 전쟁의] 희생자들이 모두 독일 동부의 재앙에 대한 증인으로 되어 버린 40년이 지난 오늘, 파괴된 중부유럽의 재구성이라는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려 있는 문제다." 오늘의 현실에서 역사의 도덕성은 어차피 승자(대서양동맹)의 손 안에 있다.

{이중의 몰락} 2부에서 힐그루버는 22쪽에 걸쳐 '사건'의 양상을 다루고있다. 거기까지 온통 "비극적인"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독일제국의 분쇄와 유럽 유대인의 종말]이라는 이 책의 부제(副題)가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관점을 하마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힐그루버는 전쟁서적에서나 나오는 '분쇄'라는 수사(修辭)를 써서, "독일제국의 분쇄(아마도 동부전선에서만 있었던)"를 "유럽 유태인의 종말"이라는 편견없는 표현과 대비시킨다. "분쇄"는 어떤 공격적인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반면, "종말"은 <어떤 대상없이> 그 자체에 의해 온다. "과감한 희생말고도 전군의 말살"이 거론되는가 하면, 투입명령을 기다리는 "상설 수속조직"이 거론되고, 한 곳에서는 "셀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이야기 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가스실은 유태인 청산에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말로 바뀐다. 어떤 곳에서는 유치한 젊은 시절의 속어가 수정되지 않은 채 나오는가 하면, 또 어디서는 부르주아적인 근엄한 표현이 나온다. <신보수주의>역사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서술의 관점만 바꾸는게 아니다. 이제는 "유대인 살상은 오로지 [히틀러 개인의] 과격한 인종 이데올로기의 귀결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시도한다.

슈티르머는 "히틀러의 전쟁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독일인들에게 전쟁은 어떠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힐그루버 역시 유태인말살에 초점을 맞춰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나치가 없었을 경우가 아니라 1933년 슈탈하이머 (Stahlheimer)가 권력을 잡았더라면 유대인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는 가정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뉘른베르크특별법]은 유태인에게 1938년까지 "특별한 의식을 강요했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면제되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그루버는 1938년 경부터 41년 사이에 이미 모든 나치 조직원들이 강제 이주 정책을 과연 유태인문제 해결의 최선책으로 생각했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하옇튼 그때까지 독일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⅔가 외국으로" 나갔다고 말한다.

1941년 이후 유태인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 나왔는데 이는 히틀러가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었다. 알고 있듯이 히틀러는 유태인을 물리적으로없앨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이런 혁명적인 방법으로 '인종청소'를 함으로써 비로소 제3제국의 세계지배를 영속적으로 보증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그루버의 마지막 말에 가정법의 변모음(독일어 가정법에서 동사가 변모음이 되는 점에 비새어, 힐그루버가 이런 가정법에 근거한 주장을 펴고 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가정법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런 말을 한다.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 P.132의 각주)이 빠져있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이번에도 유태인 말살에 참여한 사람들의 세계관을 받아 들이는지는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알지 못한다.

하여간 힐그루버는 10만 정신병자가 희생된 [안락사프로그람]과 유태인 학살을 비교한다. 사회진화론적 인간유전학 잸라고도 그 배후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살해는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다고 말해 놓고는, 이어 이와 반대로 유태인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이라는 히틀러의 생각은 그와 가까운 충성분자들, 예를 들면 "괴링, 히믈러, 하이드리히"로부터도 고립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히틀러를 유태인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결정한 최종적인 책임을 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힐그루버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다수가 입다물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설명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사실이 결국 도덕적 평가에 맡겨져야 할 것이라면 힐그루버의 험난한 수정작업의 목표는 실로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사회과학적 설명의 시도로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해설적인 역사가는 인간학적-보편적인 것을 들고 나온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암울한 사건을 받아들임은 (……) 그 과정이 역사상 유일하다는 사실을 배제한다." 독일의 고위층의 전통에 뿌리박고 힐그루버는 지금까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듯, 많은 학자들이 나치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요컨데, 개명된 민족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방임했다는 사실은 힐그루버를 역사학의 전문가 자격을 버리고 보통사람으로 돌아가게 한다.

< 3 >
본대학에 있는 힐그루버(Andreas Hilgruber)의 동료 역사학자 클라우스 힐데브란트(K. Hildebrand)는 {역사학잡지 Historische Zeitshrift)} 242권에 쓴 논문에서 놀테의 연구는 "[앞길을 밝혀주는] 이정표 같은" 좋은 글이라고 추천하는데, 놀테의 연구는 제 3제국의 역사에서 "현상적으로 유일한" 것을 끄집어내고, 총체적인 발전 속에서 "나치의 세계관과 나치정권의 유태인 말살능력"을 역사화해 내고 있기 때문이란다. {파시즘의 시대 Faschismus in seiner Epoche (1963)}라는 책으로 이미 널리 인정받았던 놀테는 사실 힐그루버와는 사뭇 다른 별종이다.

[신화와 수정주의 사이 Zwischen Mythos und Revisionismus(이 글은 원래 뮌헨의 [지멘스재단] 주최 초청 강연에 발표한 주제강연이다. 1980년 7월 24일 자 {FAZ}에 요약문이 실렸고, H.W.Koch, {The Aspect of Third Recih}, London 1985과 {사가논쟁}에 재수록되었다. 앞의 책, p134 각주)]에서 놀테는 "제 3제국의 역사"는 거의 승자에 의해 "부정적인 신화"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흥미진진한 사고실험을 소개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전멸시킨후, 승리한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O)의 이스라엘 관을 제시한다:"그렇게 되면 (……) 수십년, 혹은 수세기 동안 격동하는 시오니즘의 근원이 유럽의 반유태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정신에로 환원된다고 아무도 믿지않을 것이다." 놀테는 50년대의 전체주의 이론은 아무런 변화된 조망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소련과 마찬가지의 부정적인 형상으로 인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놀테에게는 민주적인 법치국가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전체주의 개념은 아직 충분히 전개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피차간의 말살위협이라는 변증법이다. 놀테에 의하면 아우슈비츠가 있기 훨씬 전부터 히틀러는 적이 독일을 말살시키고자- 영어 원전에는 "전멸시킨다"는 뜻으로 'annihilate'- 했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놀테는 1939년 9월 샤임 바이츠만의 세계 유태인 회의에서 대독일 선전포고를 든다. 그래서 히틀러가 독일 유태인을 전쟁포로로 간주하고, 이들을 집단 수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된다. 우리는 이미 몇 주 전에 놀테는 텔아비브에서 온 유태인 손님 프리드랜더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이 기가 막힌 주장을 했다는 주간신문 {Zeit}의 기사를 <그렇지만 이름은 밝히지 말자!> 읽었다. 나는 지금 그 기사를 읽고 있다.

놀테는 '동일화문제'를 가지고 배회하는 친절하고, 보수적인 이야기꾼이 아니다. 놀테는 단호한 결정으로 슈티르머를 의미진작과 과학의 딜레마에서 구해내고 캄보디아의 폴포트정권의 테러를 이 설명의 준거점으로 선택한다. 여기서부터 그는 "굴라그"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놀테에 의하면] 스탈린에 의한 굴라그는 그 이전에 이미 유사한 강제이주가 있었는데, 이는 목가적인 자족경제의 세상을 재건한다는 환상적인 열망으로 추구되었고, 문화적, 사회적 근대화에 반대한 저항노선으로 볼세비키 혁명기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봐뵈프, 초기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농지개혁론자들에게까지 소급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태인 절멸은 히틀러가 느꼈던 말살위협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반작용으로 단순히 유감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놀테는 말한다: "소위 제 3제국 시기의 유태인말살은 일종의 반작용이거나, 좀 잘못된 복사일뿐, 결코 역사상 유일한 시도도 아니며, 오리자날도 아니다."
놀테는 또 다른 논문[현대 이데올로기 역사의 삼부작]의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자 애쓴다. 이 논문에 대한 토론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놀테는 자신의 역사학 방식을 "철학적 역사서술"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지만 나는 오로지 "철학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

50년대 초반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이 "열린세계(Weltoffenheit)"에 존재하는지, "환경에 구속되어 있는지(Umweltverhftung)"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으로 겔렌(A. Gehlen), 플레스너(H. Plessner), 로렌츠(K. Lorenz), 로트하커(E. Rothacker)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내게 기억나는 것은 "선험성(Transzendenz)"이라는 놀테의 독특한 하이데거식 개념 활용이다. 1963년 이후 그는 이 말을 가지고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모든 전통적인 생명계의 시작의 역사과정을 인간학적--원초적인 것으로 대전환한다. '모든 고양이는 회색으로 보이는' 이 심오한 차우너에서 놀테는 "실천적 '선험성'의 조건없는 동화"에 역행하는 반근대적 흐름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자칭 존재론적으로 증명된 "세계경제,기술,과학 그리고 해방의 통일"을 이해한다. 이 모든 것은 요즈음 지배적인 분위기에 기막히게 순응한다. 분통터지는 일은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서 "맑스와 모라(Charles Moaurras), 엥겔스와 히틀러, 이들의 대립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유사점이 있다"는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설령 Marxism와 나치주의가 동일하게 "'근대'의 불안한 현실성에 대한" 대답을 주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더라도 나치주의의 진짜 의도는 그 사악한 운명의 실천이 무엇이었던가에 초점을 맞추어 실로 조심스러겝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놀테는 말한다:"나치의 '비행'은 최종적인 목적으로 결의된게 아니라, 한 인간집단을 행해 저질러진 죄는 인정하되, 그 자체가 자유로운 사회로 해방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며, 나치의 핵심인물들에게 유태인은 매우 위험한 집단으로 보였다고 고백했다."

신보수주의 현대사가(現代史家)들이 그들의 보수주의를 수정주의 놀음에 이용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정신이상자의 '배후철학(Hintergrund-philosophie)을 시비걸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다. 올해(1986) [뢰머베르크 토론회]에서 한스 몸젠(Hans Mommsen)과 볼프강 몸젠(Wolfgang Mommsen)이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는 놀테의 그것과 똑같은 제목의 주제발표를 하자, 놀테는 6월 6일자 {FAZ}의 문예란에 근엄한 체, 위선적인 핑계를 대며(나는 놀테가 [뢰머베르크 토론회]의 주제발표자로 선정된 적이 없는데, 마치 '사정상' 제외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놀테는 주최측과 서신교환을 해서 자신이 초청된 것처럼 꾸몄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전투적인 논문을 선물했다. 슈티르머 역시 이 일에 간여하여 놀테를 두둔하고 나선다.

놀테는 "가스로 죽이는 기계적인 과정"을 제외하면 유태인 학살이 역사에 유일한 것이 아니며, 러시아 내란이라는 난해한 예를 끌어들여 "수용소 군도는 아우슈비츠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Lanzmann의 영화 [쇼아(Shoah)]를 보고 놀테는 오로지 "집단수용소의 비밀경찰 역시 그들 나름대로는 피해자일수도 있다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에 의한 폴란드인 희생자들 중에도 투철한 반유태주의자가 있었다"는 사실만 떼어내서 설명한다. 놀테의 이 재미없는 [쇼아 시사회]는 그가 다 만든 술통을 그늘 깊숙이 세워두는 사람임을 보여준다[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뜻].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신문}이 주동이 되어 이 [나치의 잔악한 죄악을 고발하는] 영화를 프랑크푸르트에서 상영하지 말라고 반대시위를 했다는데 놀테의 [시사회]가 보여주는 바, 그 내용은 그럼 무엇인가?

나는 이 사실을 놀테가 과학과 의미부여(Sinnstiftung)간의 딜레마를 교묘하게 다른 걸로 고치고, 또 다른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는 것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 딜레마를 슈티르머는 "민족국가에서 더 이상 증명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민족없이는 국가도 없기에 현실적으로 분단된 나라에서 우리 독일인들은 동질성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 이 딜레마를 설명한다. 이들 이데올로기 입안자들은 단순한 민족의식의 부활을 능가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들은 민족국가의 구체적인 적을 나토(NATO)권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이런 사기행각을 벌이기에 놀테의 이론은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놀테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 즉, 하나는 나치의 범죄는 볼세비즘의 말살위협에 대한 대답으로 최소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그 유일무이한 특징을 잃어버리게 한다. 다른 하나는 아우슈비츠는 기술혁신의 부산물로 축소시키고, 여전히 독일의 문전에 서 있는 적의 "아시아적" 위협에서 <아우슈비츠의 성격은> 분명히 밝혀진다.br />
< 4 >
베를린에 [독일역사박물관]을, 그리고 본에 [서독역사관]을 짓기로 한 연방정부의 계획에 따라 구성된 '역사박물관건립 추진위원회'의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다름 아닌 이런 신수정주의적 사고가 효과적인 국민교육을 위해 그 박물관의 전시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제출된 [박물관 건립]의 타당성에 대한 소견서는 일견 다원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또 하나의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역할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주기적으로 신설계획을 선도하는 진정서나 문건 따위는 나중에 박물관 소장으로 임명된 사람이 수행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베를린의 [박물관 건립을 위한] '감정위원회'의 얼굴마담 격으로 위원이름에 올라 있는 위르겐 코카(J. Kocka)도 유사하게 예감하고 있다: "결국에는 누가 전권을 잡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 면면을 보면 이 위원회에도 분명 앞잡이가 있다."

진실된 노력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독일 국민의 역사의식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사라지지 않을 과거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도 일면 타당한 근거가 없지 않다. 마틴 브로사트(M. Broszat)는 이에 대해 설득력있는 주제발표를 했다. 한편으로는 나치의 범죄행위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나치의 일상, 무자비한 파괴가 있는가 하면, 활력있는 성취력, 그리고 믿을 수 없을만큼 치밀한 조직을 가진 반면 전혀 균형없는 근시안, 이들의 복합적인 연관은 객관적인 현재화를 견디어 낼지도 모른다. 조급하게 도덕적으로 된 부모나 조부모시대의 과거를 급하게 교육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경악할만한 과거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판결에 대한 신중한 구별은 최면을 푸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화의 이런 양식은 다행히 탈도덕화된 과거의 저당권을 '떨쳐내려는' 힐데브란트와 슈티르머가 천거한 놀테나 힐그루버의 수정주의와 달리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귀신을 구분할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있다. 한 부류의 귀신(힐데브란트, 슈티르머)은 나치과거를 차별화해서 이해하는 작업은 반성적 기억의 힘을 허용하고 불균형의 유산과 자유로이 관계할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또 한 부류(놀테, 힐그루버)는 전통적인 동질성에 대한 민족사적 정기를 위해 수정주의적 역사를 수용한다.

이런 서술로서는 아직 문제가 충분히 명료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민족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동질성의 부활을 의도한다면, 사회적 통합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계정가능성의 기능적 명령을 성취할 수 있으려면, 역사서술의 계몽적 효과를 멀리하고 역사의 의미의 광범이한 다원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신문에 쓴 미하엘 슈티르머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아무도 그를 옳지못하다고 비난할수 없을 것이다: 즉 외국인들은 "독일인들이 마주하는 역사를 두고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라고 질문한다. 독일은 대서양 방위체계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오늘 독일에 사는 세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각기 상이하고, 더러는 대립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일은 추상적인 교육으로 되는게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정치적으로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일공화국의 내적 연속성을 찾는 일이며, 외교정책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머는 사적으로 편향된 종교적 신념을 대신해서 동질성과 사회적 통합을 보증할 수 있는 '통일된 역사상'을 주장한다.
br /> 종교의 대용물로서 역사인식! 역사서술은 이따위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주의의 낡은 꿈을 요구하는 건 아닌지? 확실히 독일의 사가들은 역사주의의 아류들의 전통을 회고할 수 있다. 한스 울리히 벨러는 최근에 '소독일제국(小獨逸帝國)'의 안정을 위한 이데올로기여, 그리고 내부로부터 "제국의 적"을 구축하는데 대한 [사가들의] 기여를 회고했다. 지난 50년대 후반까지 우리 독일에는 1848/49년 혁명이 좌절된 이후, 그리고 게르비누스(Georg Gottfired Gervinus) 유형의 자유주의적인 역사서술이 좌절된 이후 형성된 사고방식이 지배해왔다. 게르비누스는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적인 사가들을 그후 거의 한 세기동안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으며, 소규모 지엽적인 집단에 불과했다.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제국과 민족, 국가의식과 권력정치를 생각했고, 이런 주장을 폈다." 1945년 이후 교육받은 젊은 세대 사학자들은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해석과 접근방식의 다원주의는 간단히 되돌릴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낡은 사고방식은 오히려 나치시기에는 살아 남지 못했던 고고한 의식에 대한 전문적인 표현에 불과했다. 나치정권과의 분규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체상실로 보였다. 역사적으로 강요된 반성은 독일의 역사서술의 이데올로기적인 전제조건과 상관될 뿐만아니라, '각각의' 역사서술의 상황의존적 특징에 대한 방법적인 인식을 강화했다.

오늘날 수정주의자들 나름대로 재구성한 전사(前史)의 스포트라이트로 현재를 비추고, 이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절한 하나의 독특한 역사사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하여간 해석학적 통찰의 오해로 밖에 볼 수없다. 날카로운 방법론적 인식은 역사상의 완결을 의미할 뿐, 정부편에 서 있는 사가들에 의해 마련된 역사상이 아니다. 다원주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결코 통제할수 없는 상태로 되는게 아니다. 책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다원주의적으로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그것은 열린사회의 구조를 반증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독일인에게 고유한 민족동질성 형성의 관습이 가지고 있던 불균형을 분명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 이는 다의적인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다시 말하면 역사의식의 형성에 수미일관하게 만들어진 역사상과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역사상은 일치될 수 없다.

요즈음 사람들은 "역사의 상실"을 한탄한다. 이는 우리의 과거사를 감추고 배제하고, 성가신 과거에 발목잡히고,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과거를 두고하는 말만은 아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민족의 상징에 대한 경배심이 많이 없어졌고, 독일인이라는 자신의 나이브한 동일화는 역사와 연관속에서 많이 후퇴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치르겠다는게 아니라 역사의 불연속성을 강하게 느낀다면, 또 민족적 긍지와 집단적인 자존심이 보편적 가치라는 여과장치를 통해서 추구되고 있다면--어떤 의미에서 이는 사실이다--이는 탈습관적인 동질성이 형성되가고 있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이런 징후는 '알렌스바흐(Allensbach)의 예언(Kassandrarufen- 아무도 믿지 않는 예언)' 으로 생각되었다:카산드라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단 한가지만 말해준다:우리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도덕적 파멸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독일이 서구의 정치문화에 대해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한 것은 바로 우리 세대가 거기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전후의 커다란 지적 성취라고 할수 있다. 결과는 독일적이고, 민족적으로 물든 나토정신을 통해서 안정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모든 개방은 독일이 중심에 놓여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극복을 통해서 완수되었다.

우리 수정주의 사가들은 이 정치지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두고 "독일은 고래로 유럽중앙에 위치해 있다(슈티르머)"든가, "붕괴된 유럽중부의 재건(힐그루버)"이라고 마치 뭔가 있는 양 과대선전한다 우리 서양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유일한 애국심은 헌법에 대한 애국심이다. 소위 문명민족인 독일인들에게 신념에 근거한 보편주의 입헌원칙의 결함은 유감스럽게도 아우슈비츠이후에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거쳐서 -- 비로소 형성될수 있었다. 누군가가 "죄의 광란(슈티르머와 오펜하이머)"이라는 미사여구로 우리를 낯뜨겁게하고, 우리 독일인들을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전통으로 되돌려놓고자 한다면, 서구사회로 결속이라는 독일의 유일한 신뢰의 토대마저 무너뜨릴 뿐이다.

3. Ernst Nollte - {ZEIT} 독자편지
(이 글은 하버마스의 글에 대한 반격이다. 1986년 8월 1일자 {Die Zeit}에 실려있다.)

신문의 [독자편지]란은 소위 '신보수주의 역사가'들이 하버마스씨의 도전을 받아들여 싸움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독자편지]란의 얼마 안되는 지면으로는 하버마스씨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역사적> 비교를 승인하는가 거부하는가, 그리고 그의 정당한 비판과 비열한 비방 등을 남김없이 다 적어낼 수 없다. 이 자리에서는 하버마스씨의 두 가지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고 그것으로부터 몇 가지 귀결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씨는 5월 16일자 {ZEIT}에 발표된 프리드랜드씨와 인터뷰를 언급한다. 인터뷰에서 프리드랜더씨는 어느 조그만 저녁모임에서 있었던 초청자의 의견 개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이야기 때문에 모임을 떠나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하버마스씨는 이를 인터뷰에서 사적인 영역에 은폐되어있던 베일을 벗기는 호재로 간주하고, 내 이름을 언급한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프리드랜더씨는 처음의 대화에서 만큼이나 당황했던 두번째 대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버마스씨는 [처음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이 나라고 치더라도] 똑같은 화제로 [소위 프리드랜더씨를 화나게 한] 두 번째 사람의 이름을 좀더 연구했어야 할 것이다. 하버마스씨가 베를린에 사는 그의 친구한테 이 '사건'을 자세히 물었다면 그가 두 번째 대화를 -- 추측컨데, 첫 번째 대화도 마찬가지로 -- 색안경을 끼고 보았는지 금방 분명해졌을 것이다. 하버마스씨는 걸핏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자주-- "계몽"을 이야기하지만 [나치 역사의] 실상을 계몽하려는 노력, 일방적인 서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차별을 두려는 계몽의 본질적인 요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버마스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증거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연하기로 했다가 발표하지 못한 나의 글이 신문에 실린 이유가 "위선적인 변명"임을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를 [뢰머베르크 토론회]에 초청한다는 공식적인 편지가 없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테마를 가지고 발표하도록 초청은 거꾸로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이 [토론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여자 직원이 일요일에 전화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버마스씨가 이 [좌담회]의 [편집인회의]의 회원으로 연사 초청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이 [좌담회]에 관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것을 "증거"로 재구성할 수도 없지만, 몇 년전에도 나를 지목해서 벌어진 똑같은 성가진 사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하버마스씨야말로 이론적으로는 "지배없는 자유로운 토론"을 주장하는 전위인 체 하지만, 실천에서는 반대로 공식,비공식으로 힘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 사회단체와 출판사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 나름의 검열관이 되려고 정열과 재능을 활용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나의 오래된 추측을 확인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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