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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역사 - 8월 26일]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보병이 프랑스 기사들을 궤멸시켰다.


오늘의 역사/8월 2010.08.26 00:00
1346년 8월 26일, 플랑드르에서 가까운 아미엥에서 북서쪽 50km 지점인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각주:1]이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잉글랜드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백년전쟁의 1기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전쟁사 측면에서도 이 전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전투에서 장궁으로 무장한 영국 보병이 중장갑의 프랑스 기병 기사들을 무너뜨리면서 중장갑 기병(기사)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군대의 주력은 다시 기병에서 다시 보병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크레시 전투부터 봉건 기사 시대가 마감했다고 평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왕위 계승을 핑계삼아 1340년부터 전쟁을 시작했다. 물론 왕위 계승은 핑계에 불과하고, 실은 부유한 프랑스 내 영토와 플랑드르를 둘러싸고 두 나라가 욕심을 내서 시작한 전쟁이다. 지금도 영국 왕은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는데, 1066년 노르만족이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이래 줄곧 노르망디는 프랑스 영토이면서도 잉글랜드의 봉토라는 묘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 왕은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중세 봉건시대에는 흔한 경우였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가 쟌다르크로 유명한 백년전쟁을 불러온 것이다.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두 나라의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절대 왕정이 수립되었다는 식의 평가가 많은데, 그건 그렇다고 치고....

잉글랜드군을 지휘한 자는 왕인 에드워드 3세(Edward III)와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다. 프랑스 측은 필립 6세가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1345년에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는 12,000여명의 군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리고 북프랑스를 거쳐 파리를 침공했다. 필립6세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최대한 군대를 소집하여 북상했다. 전력의 열세를 잘 알고 있는 에드워드3세는 플랑드르와 가까운 칼레로 철수했다[각주:2]. 그러니까 노르망디에서 캉(Caen)을 거쳐 파리를 슬쩍 맛본 후 칼레 방면으로 철수했다는 것인데, 어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독일 본토로 진공한 경로와 비슷해보인다. 그러고보니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하여 서울로 진격할때 잡은 진격로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 경로와 비슷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일도 있다.

잉글랜드군은 칼레 남쪽 크레시 근처 언덕에 진을 쳤다. 먼저 도착한 잉글랜드군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인데, 이게 장궁 못지 않게 전투의 향방을 가른 요인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약 10,000여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잉글랜드군을 추격한 필립6세의 프랑스군은 기사 중심으로 편성된 중세 군대의 전형이었는데, 정확하게 몇 명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소스에 따라 35,000명에서 100,000명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가장 적은 수로 잡아도 잉글랜드군의 3.5배에 달한다. 게다가 프랑스군의 주력은 중장갑 기병대였다. 이런 전력의 차이때문에 프랑스군이 질 것이라고는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잉글랜드군의 대승리였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가 250명 정도에 불과한 반면, 프랑스군은 10,000여명이라는 사상자를 냈다. 병력 차이 이상으로 사상자 차이를 낸 것이다. 프랑스군 사상자 중 상당수는 귀족이었다. 이런 결과를 빚은 요인으로 흔히 얘기하는 것은 잉글랜드군의 장궁이다. 장궁의 파괴력과 사정거리가 프랑스 기사들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궁만으로는 이런 결과를 내기는 힘들다.

당시 전투 상황도. 붉은색이 프랑스군, 청색이 잉글랜드군이다 (출처:위키피디어)


장궁 외에 2가지 요소가 잉글랜드군의 승리를 가져왔다. 첫번째는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 포진했다는 점이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쏘는 화살은 더 큰 운동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것은 현대 무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번째는 비떄문에 만들어진 진흙탕이다. 나는 이게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병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말 그 자체다. 집단으로 뭉쳐서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그 자체가 흉기다. 기병이 의미있는 전력이 되는 것은 말이 충분한 기동력을 가질때다. 그 기동력과 충격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제 아무리 뛰어난 기병이라도 단지 좋은 표적이 될 뿐이다. 영화 적벽대전 1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이 마음껏 움직일 수 없도록 봉쇄당한 상태와, 반지의 제왕 3편에서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는 평지에서 로한 기병대가 보여준 능력은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매우 대조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브레이브하트에서도 스코틀랜드인들이 장창으로 잉글랜드 기병을 저지하는 장면도 같은 원리인 것이다. 현대의 기병이랄 수 있는 전차도 시가지에 들어오면 위력이 반감하는 이유도 같은 이치다. 그런 일이 크레시 전투 당시 프랑스 기병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날 전장에는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 비때문에 땅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푹푹 빠지는 진흙탕에서 말들은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게다가 중장갑을 한 기사들의 체중은 말을 더욱 힘들게 한다. 진흝탕으로 변해버린 오르막길을 뛰어야 하는데 진흙과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무게가 말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보병들은 그런 프랑스 기병대를 여유롭게 장궁으로 학살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보통 기병대를 상대할 때 장창으로 밀집대형을 만들어 고슴도치가 되어 막는 전술을 사용한다. 산라 시대에도 이런 용도의 장창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장창 대신에 장궁으로 장막을 친 것이다.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뻔히 날라오는 게 보이는 화살을 피하지도 못하고 숱한 기사들이 죽었던 것이다.

크레시 전투 현장이라고 한다.(출처:위키피디어)



전투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결과는 참혹했고, 잉글랜드인들은 몸값을 낼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자들만 포로로 거두고, 나머지는 죽였다. 결국 돈이 목적인 전쟁이었기 떄문이다. 전투 후 잉글랜드군은 칼레를 공성전 끝에 점령했고, 이후 칼레는 오랜동안 잉글랜드 영토로 남았다. 칼레는 1558년에 가서야 프랑스가 다시 빼앗았다[각주:3].

이 전투 패배 후 프랑스는 오랜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원했던 영토를 상당 부분 점령할 수 있었다. 1356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다시 한 번 크레시 전투와 비슷한 양상으로 프랑스를 패배시킨 잉글랜드는 1360년에 프랑스와 브리타니 조약을 맺고 전쟁 개시의 명분이 된 프랑스 왕위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영토를 차지한 채 끝냈다.

▶참고자료
[키워드]
[분야]

[ 같은 날 다른 사건 ]
■ 1883 8월 26일, 크라카토아 화산 대폭발
■ 1918 8월 26일, 볼세비키가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하다.
■ 1996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 2005 8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하다.
■ 2009 8월 26일, 민주화 헌신 허창수(독일명 헤르베르트 보타바) 신부 선종

[ 비슷한 사건 ]


[ 관련 사건 ]


  1. 여기서는 영국과 잉글랜드를 분리하여 사용할 것이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를 묶은 나라다. 이 시기 "영국"은 잉글랜드와 오래 전에 일찌감치 잉글랜드에 통합된 웨일즈만이 있었다. [본문으로]
  2. 플랑드르는 오늘날 벨기에다. 당시 플랑드르는 모직물 공업떄문에 영국의 양모를 수입하고 있었고, 필립6세가 플랑드를 탐내어 프랑스 영토로 삼으려하자 영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영국이 1830년에 벨기에의 독립을 지원한 것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그걸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도 이미 이떄부터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본문으로]
  3. 이런 역사때문은 아니겠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은 칼레를 거점으로 했다. 이런 과거의 향수때문이 아니라 칼레가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때도 칼레를 지키던 4,000여명의 영국군이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독일군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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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1 : Comment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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